빛과생명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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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11.1.

요한복음강해 31
사마리아의 예수 공동체


요4:39-45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사마리아의 구원

요한복음 4장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죄가 많고 인생에 실패한 한 여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식의 해석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복음송가의 가사가 대표적으로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최근에 나온 CCM 중에 “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다”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울고 있었던 네가 있어서... 아무도 찾지 않는 한낮의 우물가에 이제껏 삶에 지친 네가 내게로 온다.” 권태감에 사로잡혀 있던 한 여인이 새생명을 찾는 다는 식의 감동적인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간과를 넘어 자칫 오해로 갈 수도 있습니다. 사회사적 측면을 보지 않고 한 여인의 인생사로만 국한할 때 발생하는 일입니다. 이 여인의 운명은 다름 아닌 사마리아인으로 태어났다는 데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었다면 겪지 않았어도 되었을 일입니다. 한 사람은 사회구조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맥락을 놓친다면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에 너무나 버거운 짐을 요구하게 됩니다. 구조악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라는 가혹한 요구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렇습니다. 죄악된 구조에 휘말려 사는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이기에 하나님은 그저 불쌍히 여길 뿐입니다. 한 인간이 해쳐 나가기에는 사회구조는 너무나 거대합니다. 본인은 원치 않았는데 휘말렸기에 책임을 묻기도 애매합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에 대한 인식이 바로 그러합니다. 호세아 서에서 하나님은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호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고멜은 복음 성가에서도 “음탕한 저 고멜과 같이도 방황하던 나에게”라 노래합니다. 그런데 고멜이란 여인에게 이처럼 가혹한 딱지를 붙여도 되는 겁니까? 고멜의 행동을 개인적인 부도덕성으로만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이스라엘 전체가 바알 우상 문화에 젖어 있었습니다. 우상의 전당에서 우상숭배를 행한 후 그 풍습에 따라 부도덕한 섹스 제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개인에게, 그것도 힘없는 여인에게 이에 저항하라고요? 고멜은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우상 문화의 피해자일 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 또한 사마리아 민족의 악에 빠져 있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에 의해 행해진 민족적 차별의 희생자입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이 차단당한 채 남편에게서 이를 찾으려고 발버둥쳤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제 문제의 본질을 향하여 갑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구원은 실은 사마리아 민족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민족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으로부터 해방입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39) 바늘구멍과 같이 한 여인이 구원을 받자 그 여인을 통해 큰 구멍이 열리고 민족적 한계와 차별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사람이 가진 한계성은 오늘 말씀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43, 44절입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43-44) 사람들은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소경이 됩니다. 편견이란 것은 자기의 경험이나 지식을 절대화하면서 생깁니다. 선지자들은 고향 사람이기에 어린 시절부터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불현듯이 선지자 한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가 말씀을 전할 때 고향 사람들은 이전의 지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지 못합니다. 45절에서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란 말씀은 해석하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는 갈릴리 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았다거나 믿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48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제대로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믿다 보니 그렇습니다.

사마리아에 대한 민족적 차별도 이렇게 발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사마리아 인들을 잘 안다고 하는데 실은 제대로 모르며 편견이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을 구원받지 못할 세력으로 인식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악하고 불결하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었습니다. 사마리안 여인들은 갓난아이 때부터 생리를 하기에 평생 불결하다는 인식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님이 이들의 선입관을 깨는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이 모습을 보고도 지나갑니다. 레위인도 지나갑니다. 백성들은 다음은 영웅적인 어떤 의인이나 이스라엘 평신도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인이 오더니 그가 아낌없는 사랑을 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장면에서 충격을 받습니다. 뿔 달린 마귀처럼 취급했던 사마리아인이 그런 선한 일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차라리 강도 만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고 그를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사례를 들었다면 그래도 나았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라도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 도와야 된다는 그런 사랑의 모범으로서 말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사마리아인이 사랑을 행하다니! 주님은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사랑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 편견이나 차별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정된 선입관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리를 발견하는데 장애를 줍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여러 가지로 사마리아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셨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는데 그 중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착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착하지 않고, 악하다 생각했던 사람이 선량합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선교하라는 명령을 본격적으로 내리셨습니다.

사마리아 인들에 대한 오해는 다른 방면에서도 발생합니다. 사마리아 민족과 유대인 중 어느 민족이 더 율법적일까요? 답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이들은 북왕국이 망한 후 혼합 민족이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도 유대 민족과 잘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단이나 반신앙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열심에서 그러했습니다. BC 4세기 사마리아를 비롯한 유대 전역이 헬레니즘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이에 대한 반발에서 열성적인 야훼주의자들이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모세오경만 철석같이 믿습니다. 그런데 모세오경에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라는 말이 없습니다. 단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신12:11)는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신명기에서 그리심 산은 축복의 산이요, 이 인근의 에발 산은 출애굽 후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오히려 그리심 산이 예루살렘보다 성전자리로 적합니다. 이들은 하나님 말씀을 엄격하게 해석했습니다. 지금도 그리심 산에서는 유월절 희생양 제사를 드리고 이를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듭니다.

요한복음에는 다윗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왕이라는 표현도 다윗보다는 모세에 대한 언급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런 이유 중 하나로 요한공동체를 이루던 주류 중 하나가 이 사마리아 공동체였을 가능성을 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4:19) 말하는데 이는 모세가 예언한 “너와 같은 선지자”(신18:18)를 뜻합니다. 요한복음은 사마리아 인들이 가졌던 모세의 권위보다 더 뛰어나신 분, 그 위에 계신 분으로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둘 다 한계가 있지만 유대인들보다는 사마리아인들이 더 성경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친히 듣고

사마리아 인들은 여인으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개를 받았지만 이들은 그 말만 듣지 않고 예수를 직접 보기를 원합니다. 40절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그 결과는 42절입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여기 이틀을 유하였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처음 제자들도 예수님이 만났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구하느냐”(38)하니까 제자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와서 보라”하시고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39)라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 ‘거한다’는 헬라어 단어가 ‘메노’입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듯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알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예수님과 이틀을 함께 거하며 예수님을 알아갔습니다.

동일한 단어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은유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15: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4) 여기 거하다가 ‘메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알아갑니다. 단순히 교리적 정보를 얻어서 습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와 강력한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랑의 연합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저도 설교 제목을 예수 공동체라 하였습니다. 교회는 교리적 냄새가 강하고 인간의 조직을 연상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의 연합입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와 같은 그런 강력한 연합이 어디 있습니까? 사마리아 동네에 예수님이 이틀을 유하며 예수님과 강력한 연합을 이룹니다. 주님은 우리가 교회에 소속되어 있느냐? 어떤 교리를 믿고 있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만 묻습니다. 나를 영접했느냐, 지금도 내가 네 안에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런 사람이 생명이 있고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교리나 문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늘 교제함으로 그 안에서 시원한 샘물이 늘 솟아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강해 32.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믿으라(요4:46-54)

이종철

   요한복음강해 30. 영생에 이르는 열매(요4:35-38)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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