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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 설교 2023.11.12.

고린도전서 강해 23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고린도전서 6:12-20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성령주의자들의 태도였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이를 인정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다는 것은, 어떤 행동을 취해도 된다거나 어떤 행동이든 제한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공자가 70의 나이를 일컬어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慾 不踰矩)라 하였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하여 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움의 길에 정진할 때 주어지는, 선과 일치를 이룬 최고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이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는 실상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어지는 놀라운 일입니다. 일단 죄와 저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는 신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과 같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것과 같고, 노예상태에서 자유 시민이 된 것과 같습니다. 또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법이나 윤리로부터 구속받지 않는 법의 예외 상태와 같습니다. 왕은 법의 형벌로부터 면제를 받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가 행동하는 것이 바로 법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들에게 성령이 주어졌습니다. 성령의 은사나 능력으로 나타났는데 이들의 거침없는 행동을 성령이 보장해주었습니다. 실제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취해도 우리는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거칠 것이 없습니다. 우상숭배를 하거나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생각했습니다. 우상의 제단에 앉아서 식사를 해도 어떤 저주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8:4)는 말씀에서 그들의 자신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음행에 대한 자신감도 보였습니다. 자신들은 이 뜨거운 불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판단으로 볼 때 이것은 음행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자신감에 넘치면 사람들은 엉뚱한 판단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제동을 겁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중요합니다.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헬라어 원어의 뜻을 보면 ‘함께 짊어지다’(쉼페로)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다고 하여 이것저것 다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불필요한 것은 버려야 합니다. 쓸데없는 지식이나 허영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유함의 능력을 사랑하는 데 써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어떤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이 때문에 다른 형제가 실족한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사랑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 이것이 진정한 자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다음에 이어지는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의 헬라어 원뜻은 주관하다, 지배하다(엑수시아)는 의미입니다.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유롭다고 하나 실은 욕망이나 정욕이나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내 것이 아닙니다.

근현대 철학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에 근거한 자기 주체성의 철학입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시대의 철학은 “내가 생각하는 곳에 나는 없고, 내가 없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라는 라깡의 말로 대표됩니다. 주체는 사라지고, 일상성에 빠져 있거나 세상의 욕망이나 이념이 나를 대신합니다. 나는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달려가는데, 실은 이것이 내 욕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입한 욕망이 마치 자신의 것인 냥 행합니다. 어떤 판단을 내렸는데 실은 이것은 내 판단이 아닙니다. 뉴스나 카톡에서 지시한 것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생각이나 욕망이 정말 내 것인지, 세상의 것인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내 안에서 내 생명에 필요한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음성을 따라야 우리의 생명이 충만해집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내 것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음행을 피하라

지금 바울이 여기서 가장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음행입니다. 자신들은 자유하다고 하는데 실상 정욕의 욕구가 고린도 교회의 성령주의자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죄나 여러 욕망이 많은데 그중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요일2:16)입니다. 성은 동물적 욕구로, 자녀를 낳고 번식하기 위한 본능적인 충동입니다. 프로이트는 성의 욕구인 ‘리비도’를 중심으로 인간 심리 발달 과정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본능적인데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이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쾌락에 그치면 다행인데, 인간은 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에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습니다. 이것을 간음의 죄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강요합니다. 이것을 성폭력이라고 합니다. 지나치게 탐욕하여 자신의 재산이나 생명 에너지를 고갈시킵니다. 성과 관련된 범죄는 무엇보다 사회성에서 비롯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성적인 죄에 대해서 더 엄격히 금합니다.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은 “음행보다 더 사악한 악을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이는 이미 구약의 잠언서에서 말씀하는 바입니다. 도둑질은 기껏해야 배상으로 끕납니다. 그러나 음행의 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한다”(잠6:32)

나다니엘 호쏜의 소설 『주홍글씨』는 어떻게 영혼이 망해가는지 잘 보여줍니다. 딤즈데일 목사와 헤스터 프린이 불륜을 저지르게 됩니다. 헤스터 프린은 불륜의 죄가 드러나 평생을 가슴에 ‘A’(Adultery) 자를 새긴 채 지내야 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딤즈데일 목사의 죄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때문에 딤즈데일은 양심의 고통을 느끼며 스스로를 자학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이 목사가 설마 그런 엄청난 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자학하는 모습을 보며, 죄에 대한 두려움을 설교하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더 경건한 인물로 인정을 합니다.

결국 딤즈데일 목사는 양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딤즈데일 목사는 죽기 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데 죽은 후 그의 가슴에서도 살에 새긴 A자가 발견됩니다.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셨습니다. 천사들은 쉴 새 없이 손가락질했습니다. 악마도 모든 것을 다 알고 불타는 손가락으로 만짐으로써 계속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묘하게도 사람들 눈을 속이고 죄 많은 속세에서 자기는 순결하다는 듯이 여러분 사이를 걸어다녔습니다.”

딤즈데일 목사는 불륜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파괴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음행의 죄는 절도죄와는 다른 우리 영혼에 짓는 특별한 죄인가? 오늘날처럼, 이혼이 합법화되고, 간음죄가 사라지고, 자유로운 연애나 성이 가능하게 된 사회에서도 말입니다. 아닙니다. 성서의 말씀은 음행죄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일 뿐입니다. 논리로 따진다면 몸에 짓는 죄가 음행뿐입니까? 알콜중독이나 마약이나 자살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죄를 따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성입니다. 무인도에 혼자 있으면 어떤 짓을 해도 죄가 아닙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죄이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규정한 사회적 룰을 깨는 것이 죄입니다. 죄의 경중은 타인에게 끼치는 피해 정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성적인 죄를 사회성에서 보지 않기 때문에 지나치게 성을 영적인 범죄처럼 특별하게 취급하거나, 모든 성을 적대시하고 개인에게 과중한 책임을 부여하거나, 그 역효과로 성 과몰입이나 성 도착증 등 정신병으로 발전합니다. 성적인 죄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죄악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전

바울은 음행의 죄를 정죄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고급 진리들을 오늘 말씀에 끌어들였습니다. 15절입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몸이 그리스도와 한 몸의 연합을 이루고 있고, 우리는 그 지체 중 하나입니다. 그만큼 존귀합니다. 함부로 굴려서는 안 됩니다. 나의 고통은 곧 그리스도의 고통입니다. 나의 실패는 곧 그리스도의 실패입니다. 이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죽지 않습니다. 장차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17절에서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프뉴마’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프뉴마는 곧 하나님의 영인데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영과 서로 공유합니다. 생각과 욕망도 함께 합니다. 선지자들이 주의 영이 임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선지자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동과 말은 조심해야 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19절에서는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라 말씀합니다. 여기 ‘성전’이라는 단어는 ‘나오스’인데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거주하시는 성소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신전’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신전입니다. 단순히 교회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 개인이고, 그 개인의 육체입니다. 인간의 몸이기에 하나님은 성령의 형태로 임하십니다. 우리 몸이 그만큼 소중하고, 이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입니다. 존귀히 여기고, 소중히 여기시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게 하십시오.


   고린도전서 강해 24. 결혼생활에 대한 권면(고전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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