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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3.11.5.

고린도전서 강해 22
동성애 논란


고전6:9-11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성서에서 보는 동성애

9절과 10절에 열 개의 악덕 목록이 나옵니다. 이중 앞부분의 다섯 개가 음행과 관련되었습니다. 당시 유대교나 기독교는 결혼이나 정결한 가정을 이루는 것에서 도덕적 우위를 보였습니다. 신흥종교일수록 사회적 모범이 되거나, 세속적 삶과는 다른 경건성을 보일 때 사람들의 매력을 끕니다.

음행이나 성적인 정결은 교회사 내내 주요한 경건의 척도였습니다. 개신교나 청교도 또한 이 문제에 매우 예민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성적인 문제는 다른 어느 곳보다 교회에서 자주 발생하곤 합니다. 현대 교회나 한국교회가 그렇습니다.

사회의 건강성을 성적 타락의 정도로 측정하기도 합니다. 한때 고대 로마제국은 목욕탕 때문에 망했다는 분석이 유행했습니다. 목욕탕 문화 때문에 성적 방종과 가정파괴나 출산율 저하 등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썼던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의 멸망은 가정의 굴뚝에서 연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 말한 바 있고, 이 말은 교회 설교에서 많이 오르내렸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히 성적 타락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산율 저하와 가정 경제의 빈곤에 의한 가정의 붕괴가 로마 사회의 근간을 흔들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가정을 위협하는 주범으로 음행과 함께 동성애가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9절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가 바로 동성애를 말합니다. “탐색하는 자”는 헬라어로 ‘말라코이’인데 ‘부드러운, 연약한’의 뜻입니다. 동성애에서 여자 같은 역할을 하는 남자나 어린 미소년을 말합니다. “남색하는 자”의 원어를 보면 ‘남자(아르센)’와 ‘옆에 눕다(코이테)’의 합성어입니다. 이들을 향해 “불의하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고 하여 명백히 동성애를 반대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26, 27절에서 타락의 한 징후로서 남성 간 또는 여성 간 동성애를 언급합니다. 구약도 그렇고, 성서가 동성애에 반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들에 대해서 퀴어신학은 다른 해석을 취합니다. 사랑에 의한 동성애와 성폭력에 의한 동성애를 나누려 합니다. 그러면서 성서는 사랑에 의한 동성애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로마 사회에서는 성폭력에 가까운 그런 동성애가 있었습니다. 어린 미소년을 대상으로 한 동성애는 명백히 성폭력입니다. 동성애 대상은 같은 계급보다는 노예나 낮은 계급을 상대로 이루어집니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동성애를 비판합니다. “술 시중을 드는 노예는 여장을 해야 하고 나이가 든 남자도 소년처럼 행동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다. 그는 마치 여자처럼 수염을 기르지 못하고 머리를 예쁘게 빗어 묶어야 한다. 그는 밤을 새워가면서 주인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질 때까지 술시중을 들면서 그 주인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성의 노리개가 되어야만 한다.”(『도덕서한집』 XLVII, 7)

그렇다고 하여 바울이나 성경이 동성애를 이처럼 폭력적인 것과 순수한 것으로 구분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동성애의 순수성과 선천성이 문제가 된 것은 극히 현대에 들어서입니다. 서구에서는 1970년대부터이고, 우리나라에서는 2천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2천 년 전 고대 사회가 동성애를 이런 식으로 구분했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입니다. 결혼과 가정을 소중히 여겼던 2천 년 전 유대교나 기독교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을 리가 없습니다. 그랬다면 신생 종교인 기독교는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9절의 “남색하는 자”를 sodomites(소도마이트)로 번역했던 이전 영어성경들은 잘못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를 빙자한 성폭력이 더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이유를 창세기 18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도시를 방문한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이 중동의 예의입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는 이런 전통을 어기고, 방문한 천사에게 폭력을 행사하려 하였습니다. 동성애적 섹스 행위는 남성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고대의 방식 중 하나입니다. 또한 천사에게 성이 있습니까? 천사는 남성입니까? 신약 유다서에서는 소돔과 고모라가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갔다”(유1:7)고 하는데, 이는 천사와 인간 간의 영적 무질서를 뜻하지, 동성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성폭력으로 나타난 불의이지 동성애가 아닙니다. 동성애는 성폭력의 하나로 행해졌을 뿐입니다. 그러니 소돔과 고모라를 동성애 때문에 망했다고 하여 이를 영어로 sodomite(소도마이트)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동성애의 현대적 이해

문제는 그러면 지금도 동성애를 죄로 규정해야 하는가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동성애 문제는 단지 육체적 쾌락이나 소위 변태 성욕을 인정해야 하는 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성애의 선천성 내지는 불가항력성의 문제입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는데, 동성에게 더 끌리고 동성을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이전에는 그냥 이상 성욕이나 정신적 질병으로 취급했는데 현대 과학이나 정신 의학은 이를 타고난 것으로 규정합니다. 미국 정신의학계, 세계 심리학회, WHO 등의 기관은 동성애를 더 이상 질병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성적인 방식만 제외하고 사회생활은 정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성애를 이성애로 전환하려는 전환치료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물론 성공한 사례가 가끔 있어 기독교계가 이를 이용하지만, 의학계에서는 전환치료가 정서불안을 가중시켜 위험하다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인류의 2-3%가 동성애 성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인구를 5천만 명으로 보면, 적게 잡아도 50만에서 1백만 명이 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반동성애의 근거로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는 이성애적 창조질서가 거론됩니다. 그런데 동물 사회를 보면 보노보 원숭이와 같이 일정 정도의 동성애 성향을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창조질서라는 것은 2천 년 전 고대인이 보던 창조질서입니다. 성서도 시대적 문서이기 때문에 과학이나 창조질서 이해에서는 그 시대의 세계관을 따릅니다. 성서는 과학책이 아니라, 신앙과 윤리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루는 신앙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천동설과 지동설 논쟁에서 그 한계를 보였습니다. 진화론이나 우주 연대 논쟁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질서가 오류가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면서 ‘순리’와 ‘역리’란 이유를 갖다 댔습니다. 헬라어 ‘퓌시스’ 곧 ‘본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자연질서에 어긋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퓌시스를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길러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퓌시스)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고전11:14) 남자는 머리가 길어서는 안 된다는 당시의 도덕을 자연질서로 해석한 것입니다.

창조질서는 성서에서 끊임없이 재해석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과학이나 인식 수준 때문에 하나님이 다 말씀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거나, 인간의 오해를 그대로 받아들여 말씀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예컨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지구가 둥글다고 말씀하실 수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고, 구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부족한 인식을 그대로 수용한 채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현실이나 실제적 삶과, 성서가 충돌할 때 우리는 문자에 고착되어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또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무대입니다. 실제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성서에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새로운 뜻이나 창조질서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권위가 바로 성령에 의한 성서 해석의 권세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 성서에서 미진하거나 불명확하거나 오해되는 부분은 교회의 해석을 통하여 확정할 수 있습니다.

바로 6장 앞부분에서 다루었던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문제가 그렇습니다. 이 조항을 오늘날에도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까? 현대는 세상 법정이 더 탁월하고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가 결정해야 합니다. 여성 목회자 안수 문제도 그렇습니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2:12)는 말씀 때문에 여전히 미국 침례교나 가톨릭에서는 여성 목회자를 세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계 대부분의 교단은 여성 목회자를 세웁니다. 교회가 결정할 일이고 하나님은 교회의 결정을 추인하십니다. 동성애 문제 또한 성서 문자가 아니라 교회의 해석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 때문에 세계 교회들이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 문자에만 고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서 문자에 핑계를 대서는 안 됩니다. 현실이 바뀌거나 현실에 대한 이해가 바뀌면 성서도 이에 맞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는 고대 2천 년 전의 고리타분한 문서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여전히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데 죽은 문자로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저 앞서 가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낡은 교리를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

고린도의 성도들은 당시 불의로 여기던 그런 세상에 젖어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수동태의 연속입니다. 씻김을 받았고(중간태), 거룩해졌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주어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한 개혁이면 권위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셨고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결재가 난 것입니다. 또한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체험적으로 확인됩니다. 바울은 성령을 구원의 가시적 표징으로 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너무 거룩해져서 탈이었습니다. 그래서 7장에서는 불신자 남편하고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거룩한 자신의 몸이 불신 남편으로 인해 더럽혀질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인은 이 새로움을 과신해서 심지어 우상숭배나 음행도 더 이상 문제될 것 아니라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현대 신앙인들은 고린도교인 만큼의 과신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과거는 다 씻겼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입니다. 그만큼 세상과 구분되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다시 불의하거나 더러운 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악을 구분하고, 판단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해야 될 왕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 은혜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강해 23.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고전6:12-20)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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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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