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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3.10.29.

고린도전서 강해 21
고발하지 말라


고전 6:1-8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고발 고소

우리나라는 법정 소송이 많습니다. 지난 2022년 한 해, 민사와 형사 소송으로 접수된 것만 617만 건입니다. 대략 인구 10명당 1건입니다. 1심 본안 소송으로 간 것은 110만 건 정도이고, 대법원까지 간 것은 예상 밖으로 적은 5만 건 정도입니다. 교회에서 분쟁이 나면 교회나 총회에서 결론이 나질 않습니다. 대부분 세상 법정으로 가고, 대법원까지 끌고 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교회 형제간 분쟁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을 반대합니다. 1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현대사회에서도 이 말씀을 따라야 할까요? 솔직히 따르기 어렵습니다. 교회가 심판할 수 있는 전문적 능력이나 권위가 없습니다. 교회 당회나 총회 재판국이 제대로 작동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 분열이나 이단 문제나 교회 내적인 문제를 다룰 때 조금 작동될 뿐입니다. 그것도 재산이나 신분 등 예민한 문제를 다룰 때는 결국 세상 법정에서 결론이 납니다.

이제는 낡은 유물처럼 된 이 조항이 한국교회에서 위력을 발휘한 적이 있습니다. 예장 고신 측은 1950년대 갈라져 나온 이래로 비교적 분열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970년대에 크게 한 번 분열한 적이 있습니다. 총회 직영인 고려신학교 문제로 고소파와 반고소파로 나뉘었습니다. 그 당시 고신 총회에서 내렸던 결론입니다. “성도 간의 법정제소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신앙적이 아니며 건덕상 방해되므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 본 교단 총회 입장이다.”

대단한 결정입니다. 그러나 부담이 갔던지 곧장 고소 ‘절대불가’에서 ‘남용제한’으로 곧장 바꾸었습니다. 그때 ‘반고소’파로 남았던 세력이 ‘예장 고려’파입니다. 그런데 이 반고소파가 21세기 들어 다시 자신들의 신학원인 고려신학교 문제로 분열되었습니다. 총회 측이 자신들의 직영신학교를 석연찮게 빼앗겼는데도 불구하고 법정소송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반고소’ 원칙이 설립정신이기 때문에 세상 법정에 고소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잘잘못이나 다투는 내용은 차치하고, 현대사회에서도 고린도전서 6장의 ‘반고소’ 정신을 지키려는 모습이 나름 신선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억울해도 세상 법정으로 가지 않고 교회 안에서 해결하시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따질 전문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신앙적 권면이나 지혜를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회도 전문화되었습니다. 이제 심판의 권위는 세상 법정에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교회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1) 세상 법정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입니다. 1절입니다.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한다” 4절입니다.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 6절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이미 바울은 교회 밖 세상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고전 5:5)

세상 법정은 불의와 권력과 맘몬과 무지에 의해서 돌아갑니다. 고대 사회가 그러했고, 아무리 로마법이 발전했다고 해도 현대사회만큼은 아닙니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자들, 소수자들은 많은 경우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세상을 불의한 자들이라 규정할 만합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도 그럴까요? 지금 한국사회나 한국교회가 그럴까요? 지금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입니다. 도덕적인 면이나 정의 관념에서 교회가 세상보다 탁월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개독교라 불리고, 그 부정적 측면이 자주 드라마의 소재로 쓰일 정도입니다.

강남의 모 대형교회가 교회 명예 소송 관련 재판을 했는데 그때 세상 법정의 판사가 했던 말입니다. “소송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원수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들은 다 같은 교회에서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잖아요. 서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한다고 하고 있을 거예요. 근데 ‘내 뜻이 꼭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확신을 인간이 할 수는 없잖아요. 상대방이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는 것이고, 나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서로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뜻에 반한다고 해도 서로 존중하고 좋은 방향을 찾아가는 재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뉴스앤조이, 2015.3.17.) 구구절절 옳은 말씀입니다. 교회내 분쟁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서 이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세습이나 재정문제로 논란을 빚었던 강북의 모 대형교회 목사는 판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설교를 들어야 했습니다. “경쟁에 지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고 있고, 이들을 평안한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지만, 오히려 교회가 돈과 출세라는 싸움의 대상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전도가 밖을 향한 외침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일을 모든 이에게 공개하는 것에서 신앙의 정도(正道)가 시작됩니다. 목사가 신도들과 사회에서 존경과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사랑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빛나게 하는 길입니다.”(뉴스앤조이, 2003.11,19) 휴, 세상 판사의 말이 진짜 설교 같습니다. 이 말씀대로만 따른다면 한국교회에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제가 보면 교회 목회자보다 세상 정치인이 더 깨끗한 것 같습니다. 교회의 재정 건전성은 세상 잣대로 엄밀히 따진다면 대부분 공금횡령이나 유용으로 걸리기 십상입니다.

2) 사도 바울은 교회의 수준을 매우 높게 봅니다. 2절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이 모습을 마태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요한계시록은 다음과 같이 그립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계 20:4)

교회는 세상을 심판할 권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를 달리 왕노릇한다라고 말씀합니다. 심판의 대상에는 인간들만이 아닙니다. 3절에서는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이 천사가 모든 천사인지, 타락한 천사인지, 각국을 관장하는 그런 천사인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신자들에 의한 심판의 영역은 동료 인간을 넘어, 천상계의 정사와 권세를 향합니다.

그만큼 권세가 있고 대단합니다. 우리는 왕이요 재판관입니다. 그러니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도덕적 우위를 갖지 못하면 세상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3) 바울은 교회 내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지 말아야 할 결정적 이유를 6절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8절입니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교회는 가족과 같은 공동체입니다. 논리나 정의 이전에 가족에게서 가장 우선이 되는 가치는 사랑입니다. 억울해도 참을 수 있고, 작은 일을 크게 나무랄 수도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든 법을 능가합니다. 바울은 교회 은사 문제나 우상의 제물 문제를 다룰 때도 최종적 판단 근거를 사랑에 둡니다.

교회의 권징

고린도전서 5장과 6장은 교회 권징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장로교는 장로로 구성된 당회가 최고 심판 기관입니다. 당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치리’입니다. 교회 내 문제나 개인 성도의 인격을 다루는 것이 치리입니다. 개혁교회에서 장로는 설교 장로와 치리 장로로 구분되었습니다. 설교 장로가 목사입니다. 치리 장로는 평신도 중에서, 초창기에는 시의원 중에서 뽑았습니다. 이들로 하여금 교회 내에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 원리나 방법이 마태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처음에는 직접적 권고입니다. 다음에는 다수에 의한 확증이요, 최종적으로는 교회의 결정입니다.

이 교회의 결정은 이어지는 18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하늘의 결정이 됩니다. 교회는 위대합니다. 하나님은 판단을 교회에 위임했습니다. 설교도 판단의 일종입니다.

교회의 심판이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첫째 정의와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권력자나 공동체의 논리에 의해서 판단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 말씀을 불편부당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 심판을 내리는 자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결정에 순복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현대교회의 치리는 교회 분열과정이나 교회의 불법 문제와 관련하여 남발되어 스스로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교회 심판의 최종적 근거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참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아프게 때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심판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엄혹한 잣대만 들이댔다면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이 심판을 온전하게 하고 심판의 목적을 성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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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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