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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3.10.22.

고린도전서 강해 20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고전 5:6-13
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묵은 누룩

누룩은 빵을 발효시키는 고마운 효소입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빵 만들 때 이전 반죽에서 떼어 남겨둔 누룩 덩어리로 발효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좀 지저분합니다. 그래서 누룩은 그 고마움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나 이스라엘에서는 유월절이 시작되면 일주일 동안 발효되지 않은 빵, 곧 무교병을 먹어야 합니다. 유월절 시작 전에는 대대적으로 청소해서 집안에 누룩을 제거합니다.

일전에 TV를 보니, 정통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먹을 무교병을 만들기 위해 공장에 잡균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철저히 차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반죽도 발효되지 않도록 매우 빠른 속도로 조리합니다.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6)라며 누룩을 경계합니다. 누룩은 발효력이 좋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누룩이 등장합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하나님 나라를 누룩에 비유했습니다. 단 한 절이지만 예수 운동의 실상을 잘 보여줍니다. 죄인과 세리들이 누룩입니다. 그들이 하늘나라라는 배에 은밀히 침투하여, 하늘나라의 성격을 바꿉니다. 하늘나라를 온통 부풀게 하는 성장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은 누룩을 긍정적으로 말씀합니다. 매우 이례적인 경우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누룩을 좋지 않은 사례로 언급합니다. 7절과 8절에서 “묵은 누룩”,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이라 합니다. 누룩의 고마움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곳에서, 지저분한 모습으로, 그리고 빠르게 번져갑니다. 죄가 그렇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음행의 죄를 언급했습니다. 11절에는 소위 악덕목록을 언급합니다.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여기에 언급한 죄 외에 다른 많은 죄도 있습니다. 죄는 명백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죄는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자랍니다. 무감각하거나 적당히 콘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교만입니다.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초기에 잡으면 간단하지만 통제하지 못하면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이 됩니다. 예전에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번호까지 붙이고, 거리두기 하고, 마스크 쓰며 철저히 관리했었습니다. 그런대로 잘 버텼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루에 수만 명이 나와도, 옆 사람이 코로나에 걸려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사회에 일상화된 죄악이 있습니다. 교회도 그렇게 죄에 물들었습니다. 그 안에 있으면 잘 느끼지 못합니다. 바울이 현대 사회에 와서 보면 그 무정함과 돈을 사랑함에 놀랄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맞서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 말합니다. 순전하다는 것은 햇빛에 비추어 흠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함이란 거짓되지 않고, 허황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이란 표현이 더 적당합니다. 세균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더 이로운 세균이 우점종이 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사랑에 힘쓰고, 선교에 힘쓰고, 자기 일에 열심하고 즐거워할 때, 부정적인 죄가 자라지 않습니다. 선한 것을 힘쓰고, 선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확대할 때 사회는 선해집니다.

세상과 함께

묵은 누룩을 제하라고 하며, 바울은 고린도후서처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귈 수 있느냐”(고후 6:14)라고 말했던 듯합니다(9). 그러자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하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없고 선교도 할 수 없다고 항의했습니다. 이는 바울의 뜻을 오해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명백히 직시하고, 자기 안에 죄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말은 (이런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10) 바울은 바리새파들처럼 자신을 세상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순전하게 살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성을 쌓고 그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들의 정결법이 이렇게 해서 생겼습니다. 이방인들은 죄인이고 그들과 어울리면 죄를 묻힐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식사도 하지 못합니다. 식사할 때는 꼭 손을 씻고서 먹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환상을 봅니다. 부정한 것들이 담긴 음식들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행10:13)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답합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립니다. 이런 환상이 세 번 있었습니다.

이 뜻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왔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따라가서 이방인과 교제하고, 예배하고, 함께 먹으면서 이 환상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부정한 음식은 없고 어떤 음식을 먹어도 좋다는 그런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행 10:28-29) 더 이상 이방인은 부정하지 않으니 그들과 사귀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경계를 짓고, 차별하면 선교도 사랑도 행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를 8장과 10장에서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거나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상의 제물입니다. 고린도 시장에 나온 고기들은 대부분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고 나온 것입니다. 연회나 축하 잔치에 가면 거기 나오는 고기 또한 우상에게 드렸다 나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부정하다고 하여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우상은 존재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음식은 죄가 없습니다. 이렇게 엄격히 제한하면 이방인들은 사회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룩과 같은 존재와 함께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고하게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현대 사회의 키워드는 다양성입니다. 공존과 공생이 평화를 위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하마스의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에 이미 가자 지구는 거대한 감옥이었습니다. 통행도 불편하고 직업도 제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늘 폭력과 억압의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자기 땅으로는 끊임없이 유태인 정착촌이 밀려들었습니다. 유태인들은 AD 1세기에 이 땅에서 쫓겨났고 이곳은 아랍계인 팔레스타인들이 들어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근 2천 년 후에 유태인들이 성서를 들이밀며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며 그 본토를 빼앗고, 팔레스타인들을 좁은 땅으로 쫓아냈습니다. 자기 땅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억압까지 당하니 저렇게 저항할만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해서 안전한가? 이번에는 수많은 자신들의 인명이 살상을 당하였습니다. 언제 어디서 전쟁이 날지 모르는 불안 가운데 있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이 비유하신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막 12:1-9)의 상황과 같습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는 농부들에게 임대를 주어 소작하게 하였습니다. 때가 되어 소출을 거두려고 종들을 보내니 때리고,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주인이 이번에는 아들을 보내는데 농부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7) 그런데 자기 땅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진멸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겼습니다.

이 비유가 이상한 것은 이 농부들은 정말 그렇게 폭력을 쓰고 주인 아들마저 죽이면 그 땅이 자기 땅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까? 이는 현재 팔레스타인 상황과 빗대면 이해가 됩니다. 갈릴리 지역은 부재지주들이 많았습니다. 이 농부들은 이곳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었는데 가난하거나 힘이 없어서 이 땅을 빼앗겼을 것입니다. 소작농을 치는 이 땅이 바로 원래 자기 땅이었다고 생각하니 그런 생각이나 행동을 취할 법도 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주인이나 로마 당국이 폭력으로 제압할 것입니다. 지금 팔레스타인 상황이 그렇습니다. 팔레스타인들은 폭력으로 그 땅을 되찾으려 합니다. 이스라엘은 더 강력한 폭력으로 제압합니다. 이 과정에서 주인의 사람들도 희생당합니다. 혼자 거대한 장벽을 쌓고 편안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삶이 평화롭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인정하고, 더 이상 그 땅을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벽을 쌓지 말고 공존하십시오.

자기 대한 판단

바울은 외부에 대해서는 공존하고 허용이 필요하지만 자기 내부는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인이나 세상과 함께 공존할 수는 있지만, 내 안에 죄가 있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12)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13)

바닷물은 매우 짭니다. 물고기는 그 짠물에서 삽니다. 그러나 그 몸속은 짜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소금물을 퍼내기 때문입니다. 죽은 고기는 짭니다. 소금물이 그대로 몸 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합니다.

인간은 이기적입니다. 자기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로맨스라는 태도입니다. 다른 편의 흠은 크게 보이고, 자기 편의 흠은 감싸고 너그럽습니다. 그러면 평화나, 발전이 없습니다. 반대로 해야 합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나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상대를 향해서는 이해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관계가 평화롭고 상대도 마음을 엽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태도가 그렇습니다. 인간과 피조물을 향해서는 하나님은 사랑으로 대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서는 엄격한 정의와 진리를 따라서 행합니다.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자신을 심판하였는데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묵은 누룩을 제하고, 순전함과 진실함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사랑을, 자신을 향해서는 진리의 엄격함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강해 21. 고발하지 말라(고전6:1-8)

이종철

   고린도전서 강해 19. 사탄에게 내주었으니(고전5:1-8)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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