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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3.10.15.

고린도전서 강해 19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고린도전서 5:1-8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음행의 정체

오늘 말씀은 사건의 내용만 잘 설명해도 충분한 설교가 될 것 같습니다. 바울이 비판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린도 교회에 있는 음행이고, 다른 하나는 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고린도 교회의 태도입니다.

음행이라고 하였지만, 초대교회가 비정상적이고 사회적 비난이 예상되는 그런 비도덕적 음행은 행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음행인지 아닌지 판단이 미묘한 경우입니다.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1절)라고 합니다. 아마 아버지는 살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살아 있었다면 부자 간에 매우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야곱의 장자 르우벤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서모 빌하와 음행을 저질러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아내라고 하지만 친모가 아니라 계모였을 것입니다. 친모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사태입니다. 이 같은 경우가 성서에도 있습니다. 다윗의 장자 아도니야는 다윗 사후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차지하려 하였습니다. 도덕적인 비난의 소지는 있지만 만약에 다른 사정, 예컨대 재산관계나 인도적인 견지에서 버려둘 수 없었다고 한다면 문제가 애매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에 엄밀한 도덕적 잣대를 갖다 댑니다. 율법에서는 이런 행위를 음행으로 규정하고 엄격히 금합니다. 또한 기독교는 고린도 사회에서 신생 종교입니다. 그 첫인상이 이 문제 때문에 음란한 집단이나 이상한 사이비 종교처럼 몰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대로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정결의 문제에 있어서는 유대교나 기독교나 로마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비교 우위에 있는 도덕적 자질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잘못

바울이 분개한 것은 이런 음행을 방치하는 고린도 교회의 태도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미묘한 태도를 보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라고 말하고, 6절에서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합니다. 교만, 자랑 등의 단어를 볼 때 고린도 교회는 이것을 음행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교만하다는 것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자유의식이 큰 몫을 했을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이미 영적인 해방을 얻었기에 육신의 일이나 그와 관련된 사소한 도덕적 하자는 가볍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자신들이 죄를 판단하고, 콘트롤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죄에는 장사 없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 같은데 어느새 뿌리를 내립니다. 어떤 상인이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다가 밤이 되었습니다. 사막의 밤은 춥습니다. 추위를 이기지 못한 낙타가 주인이 머문 천막에 코끝만 집어넣기를 요청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 주인이 이를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이번에는 머리가 들어옵니다. 그것도 허락했습니다. 좀 지나니 이번에 앞발이 들어오더니 큰 몸집이 천막 안으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결국 주인은 천막에서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죄가 처음에는 작은 것 같지만 점점 뿌리를 내립니다. 처음부터 싹을 잘라야 합니다.

만약 이렇게 음행을 행한 자가 유력한 자이거나, 아니면 교회에 기여를 많이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눈치를 보게 됩니다. 바울이 자비량 선교를 했던 중요한 이유입니다. 복음을 전한 대가로 돈을 받으면 사람에게 매이게 됩니다. 나중에 바울의 두 번째 방문에서 가장 심하게 충돌했거나,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삼았던 사람이 이 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죄를 지적당하면 사람은 회개하기보다는 반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그 악이 적은 누룩과 같다는 위험성을 민감하게 파악했습니다. 6절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룩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온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 적을 때 그 싹을 과감하게 잘라야 합니다.

바로 출애굽 이스라엘이,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가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 전투에서 시날 산 외투를 감추었던 아간의 죄를 물어 그 가족을 몰살하는 형벌로 단호함을 보였습니다.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가나안 정복전쟁이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재산을 팔아 그 일부를 감추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내린 죽음의 형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속였다는 이유지만 좀 가혹 정도의 조치를 내립니다. 재산을 팔아 기부하려 했던 그들의 태도는 실상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들이 우리보다 죄가 많아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기강을 잡기 위한 시범 케이스가 되었습니다. 작은 악에 단호해야 거룩함과 교회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결정

바울은 매우 단호합니다. 3절에서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이 일을 행한 자를, 마치 자신이 고린도 교회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이미 정죄하였다고 말합니다. 저 멀리 에베소에서가 아닙니다. 이는 바울이 이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고린도 교회는 함께 동참하기를 요구합니다. 4절과 5절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미 교회가 판단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이 사람을 심판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교회가 판단하는 그 순간에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 자신도 거기에 동참할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내 영’이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이 영은 단순히 영혼이나 마음 정도로 번역해서는 안 됩니다. 헬라어에서 영혼은 ‘프쉬케’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프뉴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프뉴마는 성령을 표현할 때도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영혼과 육신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육적 곧 세상적이냐, 영적 곧 하나님적이냐는 식의 구분을 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영’으로 표현할 때는 하나님과 관계성이 회복되어 성령이 자기 안에 내주하는,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된 존재를 말합니다.

그래서 내 영이 너희와 함께 한다는 것은, 바울도 이 결정에 참여하고 지지한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그 참여가 바로 성령의 입회와 같은 정도의 무게와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주 예수의 능력으로’가 붙어 교회 결정의 엄위함과 권위를 보여줍니다.

교회의 결정은 무겁고 위대합니다. 교회의 결정은 성령의 결정이고, 하나님도 이를 따릅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 말씀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교회가 죄로 규정하면 하늘도 죄로 규정합니다. 교회가 사죄를 선포하면 하늘도 이에 따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요16:8)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교회를 통해서 그렇게 하고, 교회의 결정은 하나님의 결정만큼 신성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모인 교회인데 그 결정에 오류는 없는가? 가톨릭은 교회 공의회나 교황의 결정에 오류가 없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천주교사에서 한때는 조상제사가 우상숭배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통의례로 간주하여 추모예식까지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오류까지도 감안하면서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십니다. 그러니 교회의 결정은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의 결정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한때는 맞았고,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나 상황이 바뀌면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 말씀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개혁교회의 모토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입니다.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성서를 재해석하고, 죄를 새롭게 규정하거나 폐기해야 합니다. 그런 권위가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사탄에게 내어줌

교회의 결정으로 촉구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5절입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것은 교회에서 쫓아내는 파문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초대교회가 갖는 자의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이미 사탄의 통치를 벗어나고, 사탄에게서 승리한 공동체입니다. 사탄은 육적인 세계에서만 힘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육의 세계를 지배하는 사탄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만큼 심각합니다. 또한 교회의 방탄 능력에 대한 절대적 자부심이 담겼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그 영혼을 망하게 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쫓겨난 이 사람 또한 영 곧 프뉴마로 표현합니다. 밖으로 쫓겨났지만, 예수를 믿는 이 사람이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의 죄된 육체만 통제할 뿐입니다. 우리 영혼은, 성령을 받은 우리 영혼은 건들 수 없습니다.

이는 회개하고 돌아올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죄는 지을 수 있습니다. 현명한 것은 바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유다의 길이 있고, 베드로의 길이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죄를 넘어, 자신의 영혼까지 파멸로 몰아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죄를 저질렀지만 회개하고 돌이켜 결국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저주가 아닌 축복입니다. 사망의 길이 아닌 생명의 충만함입니다.


   고린도전서 강해 20.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전5:6-13)

이종철

   고린도전서 강해 18.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5-21)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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