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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3.10.8.

고린도전서 강해 18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4:15-21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나를 본받는 자

바울의 서신서를 읽다 보면 바울은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나를 본받으라”는 이 말입니다. 어느 인간이 감히 자신을 본받으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외에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합니다.

본받으라는 헬라어는 ‘미메테스’입니다. ‘미메시스’라 하여 ‘모방’은 문학이나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입니다. 문학은 삶의 모방이고, 신화나 철학은 영원한 것을 모방하는 행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행동을 마치 원판과 같이 제시합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미메테스란 헬라어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가 원판이 되어 바울이 모방하고, 그런 바울이 원판이 되어 자신을 모방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개혁신학은 인간은 죄인이다,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그러기에 인간을 본받으라는 말을 들으면 좀 거북합니다. 인간을 영웅화하는 것을 교만하다고 평가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이고, 거룩한 성자이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사의 평가이고 이 말을 할 시점의 바울은 분명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받음을 너무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전혀 흠이 없는 하늘의 천사처럼 되라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보인 모범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의 도의 방식대로 사는 것입니다. 영광보다는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직업 교사가 아니라 부모의 마음으로 가르치는 것들입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모범으로 제시될 수 있지 않습니까?

너무 이상화시키면 오히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모범이 필요합니다. 누가 앞서서 모범을 제시하면 뒤따라가기가 쉽습니다. 영웅화도 필요합니다. 그와 같은 행동을 하고 그와 같은 목표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한국 사회나 한국 교회는 제대로 된 영웅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념이나 자기 정파가 아니면 영웅적 가능성을 가진 인물일지라도 매장하고 왜곡합니다.

교회는 이와 달리 영웅화를 조심하거나, 교조적인 인물을 영웅화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종교에서는 무엇보다 자기를 부정하고 희생하거나, 좋은 가르침을 전했거나, 인격적인 인물이 영웅이 되어야 합니다.

일만 스승과 아버지

바울이 이렇게 자신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열정이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15) 자신은 직업적 교육자처럼 가르친 것이 아니라, 부모처럼 교육했다고 말합니다. 여기 스승이라 번역된 헬라어는 ‘파이다고고스’입니다. 갈라디아서에도 등장하는데 예전에는 ‘몽학선생’이라 했고 개정판은 ‘초등교사’라 부릅니다.

고대 그레코 로만 사회에서 이 일은 주로 노예들이 맡아서 했습니다. 아이들의 등하교 길에 동반하고 간단한 교육도 가르쳤습니다. 더 넓게는 철학자들이 교육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돈 받고 일하는 직업인들입니다. 가르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그것을 제대로 소화하는지, 자신의 것으로 인격화하는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부모처럼 가르쳤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성장과 성공을 자기 일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어르고, 달래고, 눈높이를 맞추고, 모범을 보이며 어떻게든 자녀를 이끌어갑니다. 다른 성경에서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살전 2:7)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성격도 죽이고, 자기를 희생하며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쏟습니다.

바울의 모범에 따르면 목회가 그렇습니다. 직업인과 부모의 역할입니다. 하나님 말씀만 전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성도의 인격과 삶을 살펴야 하고 부모처럼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렇지만 교회나 사회가 대형화되고, 전문화되고, 개인성이 중요해지면서 두 가지 역할을 다 맡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그 문제가 폭발한 것이 이번 학교 교사와 교육권의 문제입니다. 여전히 전근대적으로 교사에게 직업인과 부모라는 이중 역할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그에 따른 권리와 책임을 주던지, 아니면 이제는 분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이 자세는 본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놓치지 않습니다. 거기에 사랑과 열정이 담았습니다. 자기 직업에 그래야 할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능력

바울은 중요하게 보는 것은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19)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멉니다. 아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 먼 거리는 가슴에서 손발까지의 거리입니다. 자신이 깨달은 것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지식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하늘나라를 소유한 자처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려한 말과 지식보다는, 실제 그 말로 사람을 감화하고 설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눌하고 더딜지라도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킨다면 그것이 진짜 능력입니다. 화려함은 단지 수단일 뿐입니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도 말이 아니라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능력은 행동으로 나타나고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20) 이 말이 중요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보다는, 그 복음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기를 원합니다. 배타적이고 차별적인데 어떻게 거기서 사랑의 복음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분열적이고 권위적이고 탐욕적인데 어떻게 그런 모습에서 천국이 실제한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기쁨과 감사보다는 불평과 두려움의 소리가 가득한데 어떻게 거기서 복음의 자유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행동은 말보다 더 큰소리를 냅니다. 우리는 행동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는 말보다는 행동을 믿습니다.

바울의 방문

바울은 부모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있기에 문제가 생기면 바울은 직접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이것이 여의치않으면 다른 사람을 보냅니다. 17절에 언급된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이라 불리는 디모데입니다. 디모데는 이미 아테네 사역 중에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짧은 기간 개척되었기에 여러모로 안정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만 아테네에 홀로 남고, 디모데를 이곳으로 파송했습니다. 이번에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려 합니다.

이마저도 여의치않을 때 보낸 것이 편지, 곧 서신입니다. 고린도 서신이 그러합니다. 바울이 직접 여러 교회로 가지 못했던 것이 우리로서는 다행입니다. 직접 만나는 것이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은 될지라도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글로 남긴 것은 영원합니다. 역사에서는 칼보다는 빛바랜 잉크가 더 강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약간 화가 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주의자들을 18절과 19절에서 “교만한 자들”이라 부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세례를 주고, 가르친 스승과 같은 존재인데 감히 비평하고 분열하니 화가 났을 법도 합니다. 21절에서는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 말합니다. 매까지 등장한 것을 보니 바울이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바울은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이 분열주의자들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바울은 이 방문을 했을까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실제 방문했습니다. 고린도후서 곳곳에서 이 두 번째 방문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바울 스스로 근심스런 방문이었다고 밝힙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고후2:1-2)

아마 바울 앞에서 이 분열주의자들이 직접적으로 반발했던 것 같습니다. 급기야 바울의 사도권까지 문제 삼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바울의 방문은 교회에 더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이 때문에 돌아가서 눈물로 쓴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고후2:4)

직접 만나는 것이 때로는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곪은 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부딪치는 것이 낫습니다. 외면하기보다는 우리는 그 과정에서 잘 수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들어야 합니다. 그 바탕에서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든지, 아니면 회개를 요구하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문제를 외면하는 타입이 아니라 직면하고 어떻게든 해결점을 찾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상을 방문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의 모든 원망과 한숨과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구원과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힘을 얻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강해 19. 사탄에게 내주었으니(고전5:1-8)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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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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