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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3.10.1.

고린도전서 강해 17
제대로 왕노릇 하라


고전 4:6-13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교회의 왕노릇

고린도 교회에서 분열을 일삼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들에 대해 바울은 ‘왕노릇한다’고 비난합니다. 가난한 고린도 교회에 무슨 권세를 부릴 일이 있겠습니까? 재물이나 지위나 무슨 특권이 있었겠습니까? 여기서 왕노릇은 말의 권세입니다. 판단하는 권세입니다. 종교인은 입으로 먹고삽니다. 죄를 규정하고, 성서를 해석하고,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권세입니다.

한국교회의 실패는 제대로 왕노릇하지 못해서입니다. 양적으로는 성공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의 성공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종교의 주요한 역할은 정신적 기능, 곧 말의 기능에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빵이나 재물을 가져다주는 것이 종교가 아닙니다.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일깨워주는 것이 종교가 해야 될 일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욕망을 제거하는 데 참 행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영원한 가치를 위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내려놓도록 도와야 하는 데 이런 가치를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성공이나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낙담한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겸손케 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나눔과 희생의 가치를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경쟁과 승리보다는 공동체성과 가난한 자에 대한 나눔과 사랑의 가치를 심어주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인지 끊임없이 제시하는 것이 설법이요, 설교입니다.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에 긍정적 가치를 전혀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분열과 정죄는 종교의 길이 아닙니다. 화합과 용서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성소수자 배척, 타종교 배척, 공산주의 이념 배척은 교회의 길이 아닙니다. 말의 권세를 독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우리 사회가 탐욕적이고, 혼란스럽고, 무정한 사회가 된 것은 전적으로 교회의 실패입니다. 말의 왕노릇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배불렀다

고린도의 일부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가 보면 세 가지가 그 이유입니다. 첫째는 6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달리는 8절,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자유롭다고 하여 모든 것이 가능한 게 아닙니다. 제한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그 한계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종교개혁은 중세 가톨릭이 성서를 벗어났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성서를 외쳤습니다.

제한은 성서에만 있지 않습니다. 성서 해석에서도 제한이 걸립니다. 이는 교회에 의한, 달리는 교회 전통이나 교리에 의한 제한입니다. 이단들은 교회나 교리를 무시합니다. 자신들이 깨달은 것이 있다면 교회를 설득해야 합니다. 교회의 설득을 얻지 못하면 버려야 합니다.

둘째는 은혜를 잊었습니다. 7절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모든 것을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데 이것을 망각합니다.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지혜를 얻었습니다. 말씀의 가르침은 바울과 아볼로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치 원래부터 자기 소유였던 것처럼, 자기 노력으로 그런 깨달음에 이른 것처럼 자랑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것을 얼마나 큰 은혜인지, 항상 자신을 복음의 빚진 자라 말합니다. 공동체성은 은혜의식에서 나옵니다. 그 사회나 공동체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감사의식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거나 나눌 수 있습니다.

셋째는 이미 배부르고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헛짓거리를 하기 마련입니다. 다윗의 실패는 통일왕국을 다 이루고 그 목표가 사라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들은 ‘실현된 종말론’적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령을 체험한 현상을 부활 체험과 동일시했습니다. 이미 자신들은 구원에 이르렀기에 다른 노력을 게을리하고 지식 놀이에 빠졌습니다.

이와 반면에 아직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2:12)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뤄간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회에는 끊임없이 시대정신이 필요합니다. 시대정신은 민족이 나가야 할 방향입니다. 시대정신이 없으면 민족이 방자해지고 탐욕이 지배합니다. 식민지 해방이, 근대화가, 민주주의가, 통일이 한때는 시대정신이 되어 민족을 이끌어왔습니다. 이제는 선진화나 세계시민성이나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 건설 등의 시대정신이 있어야 민족이 건강합니다.

사도의 왕노릇

제대로 된 왕노릇이 무엇인지 사도 바울과 아볼로는 자신들을 본보기로 보여줍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6) 그 본이라는 것은 지배나 영광이 아닌 고난과 희생이었습니다. 9절 이하는 바울의 역경목록이라 부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자기희생, 섬김, 고난입니다. 사도가 고난을 많이 받은 만큼 성도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 보십시오. 9절입니다.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이는 경기장에 끌려간 검투사나 사형수의 모습입니다. 사람들로부터 공개적으로 모욕을 받고 그 죽음은 매우 비참합니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서를 쓰고 있는 에베소는 연극장으로 유명합니다. 1만 명 정도 수용할 수 있고 지금도 공연이 가능할 정도로 거대하고 튼튼합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사자와 더불어 싸워야 하는 사례들 들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고전15:32) 복음을 전하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도자는 앞장서서 뚫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선구자는 고난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바울은 많은 지식과 그럴 자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10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울은 우상제물이든 어떤 음식도 먹을 모든 지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실족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자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그 수준에 맞춥니다.

칭찬받고 영광받을 수 있지만 그것이 기쁨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신앙을 가지고 제대로 성장하는 것이 더 기쁩니다. 이것이 부모의 기쁨이요 장인의 기쁨입니다. 작품이 영광스러워야지 자신이 영광스러워서는 안 됩니다. 작품보다 작가가 영광을 받을 때 타락은 시작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한 대가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12절입니다.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바울은 친히 자기 손으로 일하는 자비량 선교를 했습니다. 선교사는 일한 만큼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지만 바울은 이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효율적으로 전파되기를 원해서였습니다. 대접받으면 자신에게서 복음의 은혜가 망각됩니다. 대접한 자는 교만해지고 자칫 복음이 물질에 매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자비량 선교 모델 때문에 현대 선교에서도 선교사가 자기 월급까지 스스로 마련하는 자비량 선교를 요구하는 곳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효율성입니다. 생계 걱정 때문에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고,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면 복음의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자비량 선교가 모범이 아닙니다. 이는 복음의 효율성을 위해 바울이 선택한 방식일 뿐입니다.

최근에는 목회자의 이중직 문제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어느 유명한 목사가 목사가 다른 직업을 이중으로 갖는 것은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는 취지의 설교였습니다. 예 물론 목회라는 직업에 전념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바울의 이중직은 생활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효율적 전파를 위해서 그랬습니다. 초점은 이중직이나 자비량 선교가 아닙니다. 시대의 상황에 따라 방법론들은 조정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온갖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11-13)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물이나 쓰레기와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비방을 받을 때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참았습니다. 정치문제로 얽히고, 폭력으로 비화되면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고난이 목표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교회를 보호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도들이 고난을 받는 만큼 교회는 성장합니다. 사도들이 앞서서 비난받는 만큼 성도들은 그 화살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성장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아픈 만큼 성장합니다. 지도자는 공동체의 아픔을 대신 당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된 왕노릇입니다.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라는 엄청난 고통을 통해서 모든 생명을 살렸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생명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성장한 성도들이 자녀가 아니라 부모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리길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강해 18.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5-21)

이종철

   고린도전서 강해 16.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전4:1-5)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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