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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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1.9.12.

요한복음강해 75
제자들의 발을 씻기다


요 13:1-1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세례와 정결

가장 가까운 이웃이지만 우리는 가톨릭에 대해서 너무 모릅니다. 그 구원관에 대해서 가톨릭은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사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세례입니다. 세례의 효력이 대단한데 세례를 받는 순간 원죄가 씻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에서 이 문제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테스는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어갑니다. 그래서 신부에게 유아세례를 청하는데 신부는 이를 거부합니다. 정상적인 결혼을 통해서 난 아기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입니다. 아기를 지옥에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테스는 자신이 스스로 아기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콘스탄틴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황제입니다. 그런데 이 황제가 죽기 직전에서야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논란이 많았습니다. 정말 신앙이 있었던 거냐? 정치적으로 기독교를 이용한 것이 아니냐 하면서요. 그런데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이 때는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면 세례를 늦게 받으려 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원죄가 씻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아야 천국에 갈 확률이 높습니다. 이러니 이런 세례를 베풀 수 있는 교회나 사제의 권위는 정말로 막강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개신교의 교리는 바로 가톨릭의 이 지점을 개혁한 것입니다.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으면 원죄는 씻을 수 있지만 인간은 그 이후에도 죄를 저지릅니다. 이 후의 죄를 씻는 의식이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세례와 고해성사의 구조는 오늘 읽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세례는 몸을 씻는 것이요, 발을 씻는 것은 고해성사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가톨릭의 신학을 정당화하는 말씀으로 많이 적용되었습니다. 가톨릭 교리와 일치여부를 떠나서 예수님이 행한 의식의 중요성은 바로 이 씻음에 있습니다.

8절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10절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는 말씀은 씻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단지 몸을 씻는 목욕에 대한 강조가 아닙니다. 목욕은 상징이고 그 의미는 정결입니다. 달리는 죄의 씻음입니다. 씻는다는 것은 물로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행동입니다.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은 죄이고 우리는 말씀의 물로 오염된 것을 씻습니다.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된 자들입니다. 10절에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형식적인 씻음이 있다고 하여 다 정결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톨릭의 교리와는 맞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우리 영혼을 씻어야 그 사람이 정결한 사람입니다.

온전한 씻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루어진 세족식 의식을 통하여 이를 잘 보여줍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목요일 밤에 이루어진 성만찬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를 보도하지 않습니다. 이미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기적을 통하여 성만찬의 의미를 충분히 보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빵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먹어야 우리는 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를 씻는 것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으로 오셨습니다. 그 마지막 모습은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죄를 씻을 수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군병이 그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그 몸에서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19:34) 이 피와 물은 실제이기도 하지만 강한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완성된 이 피와 물로 우리는 씻음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피이고 물입니다. 말씀은 문자가 아니라 치료의 능력이 있고 정결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씻는 정결은 모든 종교에서 중요했습니다. 이슬람 사원에는 손과 발과 입을 씻는 정결대가 그 입구에 있습니다. 유대교에는 정결법이 매우 발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식사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방인의 죄가 자기들에게 묻을까봐 두려워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데 그 이유는 손에 묻은 죄를 먹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의 규례에 보면 만약 문둥병 환자가 가까이 있으면 빨리 바람이 부는 맞은 편으로 가야 합니다. 문둥병의 전염 때문이 아니라 문둥병이라는 죄가 바람을 타고 날아올까 염려해서입니다. 유대의 쿰란 공동체란 곳은 먼지가 잘 나고 물이 귀한 광야지역에 위치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입구에는 목욕탕 크기의 정결예식소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 민간에서도 그러한데 무등산 수박은 매우 신성하게 취급합니다. 그 수확철에는 상가도 가지 않고 밭으로 들어갈 때는 목욕재계하고 들어간다고 합니다. 부정함을 씻는 의식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참회의 시간과 사죄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롬8:1) 참회는 우리 양심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원래는 예배 시작 전에 있어야 합니다. 깨끗하게 씻긴 손과 발로 우리는 하나님을 뵈어야 합니다. 말씀과 믿음이 이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죄를 씻는 능력이 있습니다.  

발을 씻음

오늘 말씀의 의미를 먼저 설명했습니다. 세족식은 조용한 집안에서 진행됩니다. 여전히 마귀가 침투하는 곳이지만 그래도 대중을 상대할 때나 야외보다는 평화롭습니다. 진정한 패밀리입니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겉옷을 벗으시더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한쪽 팔을 기대고 반쯤 누운 자세로 식사를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발이 씻기면 서거나 앉는 자세보다 더 교만한 자세가 됩니다. 제자들은 매우 당황하고 황송했을 것입니다.

발을 씻는 일은 노예들이 하는 행위입니다. 샌달을 신고 먼지가 많은 중동에서 발은 가장 더럽습니다. 그런데 이 발을 예수님이 씻다니요. 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성스레 씻은 발을 수건으로 닦았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일일이 이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다 베드로의 발을 씻길 차례가 되자 베드로가 그 황송함을 견딜 수 없어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6, 8) 하며 사양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 하며 마저 씻으셨습니다. 배신자 유다의 발 또한 씻으셨을 것입니다. 세족식의 의미는 앞에서 살폈습니다. 이 의미에 앞서 주님이시요 하나님이신 분이, 제자요 흙에 불과한 인간의 발을 씻는 모습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베드로의 거부는 당연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의 발을, 주님이 제자의 발을 씻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자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원리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윗사람이 아래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사랑을 많이 받은 자가 나중에 자녀나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일평생 사랑에 굶주린 사람이 됩니다. 사랑을 먼저 받지 못한 사람의 사랑은 왜곡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많이 받은 만큼 아래로 많이 흘러주면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몇 명만 그 발을 씻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제자에게 그러했고 유다의 발 또한 씻기셨습니다. 유다의 발을 씻길 때 예수님이나 유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발달 장애인을 섬기는 라르쉬 공동체를 설립하고 이후 템플턴상까지 수상했던 장 바니에의 『봉사의 스캔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스캔들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데 봉사가 가져오는 파장을 연상시킵니다. 그 내용 중에 유다의 발을 씻길 때의 예수님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상상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나약함과 상처와 질투심을 알고 있습니다. 악마가 당신을 사로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이 모든 두려움, 특히 악한 영에서 벗어나 사랑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79)

그러나 유다는 이 사랑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2절에서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랬는데 27절에서는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고 전합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세족식이 유다를 더 화나게 했을는지 모릅니다. 혁명을 논의해야 할 때에 한가롭게 식사를 하고 발이나 씻는 노예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니. 그 순간 유다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기를 포기했을는지 모릅니다. 갈등을 일으키던 마귀가 이제는 유다의 영혼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곁에 있는 작은 공동체를 향한 사랑입니다. 섬김을 많이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곳간이 비어서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마르고서야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분노의 화염만 토해낼 뿐입니다. 어린 시절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자가 그 마음에 여유가 있고 넘치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많은 음식을 먹어보았던 자가 좋은 요리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귀족은 귀족의 아우라가 있습니다. 범상치 않은 귀족의 품위가 있습니다. 섬김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존귀한 존재로 인식하며 살았기에 알 수 없는 기운이 품어져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안에 생수의 근원을 품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한 하늘의 강과 연결됩니다. 마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먼저 이 물을 흡족히 마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시원한 생수가 솟구쳐 올라올 것입니다.


   요한복음강해 74. 심판과 구원(요12:44-50)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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