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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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1.9.5.

요한복음강해 74
심판과 구원


요12:44-50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말씀’입니다. 이미 요한복음은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며 예수님을 말씀으로 선언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반복되는 것이 말씀입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20세기의 대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방대한 『교회교의학』에서 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명명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세 가지 양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지칭합니다. 둘째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성서를 말하는데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문자적으로 증언합니다. 셋째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설교나 선포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릅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말씀으로 존재하기에 예수님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48절 말씀이 가능합니다.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말씀이 심판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서를 읽으며, 또 설교를 듣는 이 순간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은 것은 죽은 문자를 읽거나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문자가 아니라 영으로 임재 하시는, 바로 ‘오늘’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크게는 1-12장, 13-21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대중설교에 해당하는 12장까지를 마무리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모든 말을 하였는데 이 말을 믿거나 지키면 생명이요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이런 형식은 이미 신명기 말씀 구조에서 잘 드러납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모압 광야에서 하루 동안에 한 설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한글성경으로 무려 72회나 사용됩니다. 주로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식입니다. 그런데 이 ‘오늘’이 언제입니까? 모세가 신명기 말씀을 전하던 모압 광야에서의 그 하루입니까? 아닙니다. 이 신명기 말씀이 읽히거나 선포되는 그 ‘오늘’입니다. 그때는 유월절 축제일 수도 있고, 매일의 제사가 드려지던 그 날일 수도 있고,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읽던 그 날입니다.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오늘입니다. 말씀은 살았고 영원합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도 이 말씀은 미래의 그 오늘일 것입니다. 말씀으로 임재하시는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영원한 오늘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말씀을 마치며 이 말씀에 대한 순종 여하에 따라 우리의 복과 화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30: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32:46-47) 말씀은 생명입니다. 여기서 생명이라고 할 때 그것은 추상적인 뜻이 아닙니다. 병들지 않고 건강한 생명입니다. 굶주리지 않는 윤택한 생명입니다. 사고나 전쟁으로 죽지 않는 안전한 생명입니다. 말씀순종이 우리의 장수와 건강과 안전을 결정합니다.

모세와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말씀과 육적 생명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말씀을 영적인 생명과 연관시킵니다.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48)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50) 이제 우리 육신의 화와 복, 영혼의 구원과 심판을 결정하는 것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을 믿을 때 영원한 장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내 말은 곧 하나님의 말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된 이유를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하나 됨에서 찾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 항상 “나를 보내신 이”라 합니다(44, 45, 49).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주체성이나 개성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반복할 뿐입니다. 자기 말과 하나님의 말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또한 영화로우신 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자기 생명을 충실히 실현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보내신 자의 뜻을 이루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명을 더 충만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생명의 충실성 또한 관계성에서 주어집니다. 다른 누구의 삶을 위할 때 자기 생명도 충실해진다는 교훈입니다. 예전에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구절 중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구절을 암송할 때마다 매우 의아했다고 합니다. 어떤 누가 자기 인생의 목적을 규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무 문제가 없었나요? 독재권력이 국민을 통제하려는 목적에서 이용되었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였습니다. 자유로운 결정이 아니라 강요하였기에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성이나 관계적 삶의 중요성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맞으며 K-방역의 성공에 대한 분석들이 많습니다. 그 중요한 동기중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거리두기 하고, 마스크 쓰고, 백신 맞고 그렇습니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수용하는 것은 또다른 공동체성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 자신의 생명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란 것도 타인이 규정합니다. 자녀를 낳고 기르고 많은 것을 주는 것이 우리 중요한 목적 중 일부가 되었습니다. 사회나 조직 속에서 자기 역할이 곧 자기 평생 직업이 됩니다. 내 일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때 우리는 보람을 느낍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먹을 것과 환경을 제공합니다. 인간이나 기생충이나 온갖 균류는 먹고 분해해서 자연을 다시 원상태로 순환시킵니다. 이 순환 사이클이 원활하지 않거나 정체될 때 이것이 곧 재앙입니다. 관계성이 생명입니다. 이기적 삶은 죽음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관계성에서 완전한 일치를 보입니다. 전혀 분리됨이 없습니다. 자기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자기를 보는 자는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다, 자기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합니다. 요즘은 이것을 ‘자의식 쩐다’고 합니다. 강력한 자기 확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 자기 확신이 필요합니다. ‘내 결정이 곧 신의 뜻이다.’ ‘내 말이 곧 진리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과대망상증 환자나 어떤 미치광이 정치인이나 교주 말고요. 평범한 일반인이 이런 확신을 갖는 것은 무리일까요? ‘이 주식 반드시 뜬다’ ‘집값 반드시 오른다’와 같은 무당식 예언도 말고요. 자기 인생에 대한 확신, 자기가 걸어가는 길에 대한 확신, 자기가 살면서 깨달은 진리나 삶의 방편이나 가치에 대한 확신 이것들이 필요합니다. 지도자를 만드는 것 또한 이 확신입니다. 민족의 미래나 삶의 가치에 대한 확신입니다. 자석에 철가루가 달라붙듯 이런 리더에게 사람들이 몰립니다.

심판이냐 구원이냐

계속 반복되는 주제이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47)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심판이라는 사건은 왜 발생하는가? 그것은 스스로가 빛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에 빛을 비춥니다. 이 빛을 보거나 품는 자는 빛 가운데 살 것입니다. 그러나 빛을 거부하면 그냥 이전처럼 어둠에서 지내야 하고 그것이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이것을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라도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plans)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여기 생각이라는 단어는 plan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비록 고난 가운데 있어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은 우리에게 더 좋은 미래를 보장하고 희망을 주려는 데 있다 합니다.

우리 또한 이 관점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심판의 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죄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잘 하고 있어.” “잘 될 거야.”가 바로 신앙인들의 말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차별이나 혐오나 정죄의 시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자신을 향해서도 더 이상 정죄의 말을 멈추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려는데 스스로 심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뜻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타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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