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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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 설교 2021.8.29.

요한복음강해 73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요12:34-43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사야의 말씀

예수님은 메시야로, 하나님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면 모두가 예수님을 믿었어야 하지만 유대인 중 일부만 믿었습니다. 상당수의 유대 엘리트들 그리고 그들의 출교 위협 때문에 많은 유대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요? 역사학자나 정치가들은 예수가 민중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힘이 약했다는 그런 평가를 내릴지 모릅니다. 신학자들은 인간이 완악해서 그랬다는 분석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다른 식의 평가를 내놓습니다. 38절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말씀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이렇게 계획했다고 합니다. 40절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인간이 완악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출애굽 때 완강히 저항했던 바로의 행태에 대한 설명에서도 나타납니다. 바로가 완악해서도, 강해서도, 하나님이 약해서도 아닙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롬9:17)

여기서 예정론이나 유기론이라는 복잡한 신학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신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신학이 생겼는가 하는 그 맥락입니다. 이는 단지 약자들의 정신승리 또는 현실을 망각한 허위의식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악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원수가 지금 승리하고 강한 것 같지만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야 그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야 하는 태도입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여유가 있고 즐길 수 있습니다.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분노가 생기고 좌절하거나 포기해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이미 영화의 시나리오를 알고 있는 자의 여유와 같습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위기를 맞지만 오히려 즐겁습니다. 위기가 있어야 영웅도 탄생하고 영화가 재미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이런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당할 것은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몸도 힘든데 마음마저 무너져서야 되겠습니까?

말씀이 이루어진다 또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말씀에서 그 맥락을 이해해야 우리는 제대로 말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약자들을 위해서 쓰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힘 있는 자의 횡포에 저항하는 문학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자의 하나님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힘 있는 자들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의인들을 위하여 마련되었습니다. 말씀을 권력자들의 손에 넘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

이사야는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41) 어떤 주의 영광을 보았을까요? 이사야는 북왕국이 망하고 남왕국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을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사야는 제사장이었는데 성전에서 기도하다 성전 지붕이 날아가고 하늘이 열리며 높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6:1)  

하나님을 본 순간 이사야의 고백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이런 감정을 ‘누미노제’라고 부릅니다. 신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입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을 보니 자신의 초라함이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5절 말씀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다”는 말씀을 유대교(아람어 탈굼)에서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의 영광을 보았다”로 번역하여 ‘영광’이라는 단어를 더합니다. 이 ‘영광’이라는 단어가 ‘쉐키나’입니다. 쉐키나는 원래 현존, 보좌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날 때 사용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보다는 하나님의 쉐키나, 곧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 본체가 영광입니다. 인간은 직접 하나님 본체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쉐키나는 곧 예수님이고, 곧 쉐키나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초대교부들은 이사야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때 보았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러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지금 요한이 증언하는 에수님이 바로 이 하나님의 쉐키나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요한은 고백한 바 있습니다.

보는 영광이고, 손으로 붙잡는 영광입니다. 요한일서 1장에서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선언합니다. 어떻게 생명을 만지고 말씀을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고 말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하나님의 쉐키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손으로 붙잡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의 영광

그런데 이 영광을 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43절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신앙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실제 우리가 2천 년 전 팔레스틴 땅에 있었다면 이것이 간단치 않음을 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 곧 사람의 아들입니다. 약간은 비범해 보이지만 그래도 시공간의 한계에 갇힌 한 인간을 보면서 여기서 영광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듯 확연했다면 유대 엘리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들이 믿지 못한 이유를 성경은 ‘사람의 영광’을 취했기 때문이라 규정합니다. 사람의 영광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권력과 힘과 부와 세력과 명예입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력이 없었습니다. 권력이 없었습니다. 그냥 갈릴리 어부들과 무지렁이 백성들 일부만 따랐을 뿐입니다. 이런 한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영광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요?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존재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평범성에 담긴 영광, 진흙투성이에서 영광을 어떻게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눈이 열린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주셔야 우리는 예수님의 쉐키나를 볼 수 있습니다.

눈이 열려 이 쉐키나를 본 사람은 잠잠할 수 없습니다. 생명 덩어리가 내 안에서 꿈틀대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영광을 본 자에게 나타나는 감정이 바로 기쁨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에 세상의 영광은 시시해 보입니다. 그래서 권력이나 재물이 그 마음을 빼앗지 못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면서도 여전히 권력이나 재물에 휘둘리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의심해야 합니다. 출교나 세상의 위협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사라짐 사람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

영광을 본 자는 빛의 자녀가 됩니다.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36) 사람의 영광을 취하는 자는 그냥 인간적인 사람이 아니라 어둠에 붙잡힌 부정적 인간입니다. 35절 말씀에서는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고 경고합니다. 어둠은 하나의 세력이고 힘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깨어 있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빛으로 나가지 않으면 어둠이 우리를 붙잡아 버립니다. 권력과 재물이 우리를 얼마나 나락으로 몰고 가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권력과 영광을 추구하다 우리 영혼을 망칩니다. 권력과 영광을 두려워하다 우리 영혼을 팔아먹고 맙니다.

빛을 본다는 것은 빛을 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본다고 할 때 보는 대상은 밖에 있지만 그 지각 현상은 우리 뇌 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깥에 있는 빛이 내 안에 들어옵니다. 빛을 보는 순간 우리 안에 빛이 켜진다는 말은, 말이 됩니다. 예수의 영광을 본 사람은 그 영혼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는 더 빛나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의 얼굴은 빛의 통로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표정을 읽습니다. 어떤 뇌과학자는 “타인의 얼굴을 보고 감정이 안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오랜 진화의 역사에서 인간은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적인지 아군인지를 판단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생성되는 복잡한 감정이나 분위기가 우리 얼굴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링컨이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맞습니다. 내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이 나타납니까? 타인은 나를 보며 어떤 느낌을 갖거나 분위기를 느낍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빛이 내 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빛을 품고 있습니다. 내 얼굴에서 그 빛이 새어 나오고 있습니까? 분노와 원망과 근심이 가득하면 그 어두운 빛이 우러나옵니다. 욕망과 거짓과 음욕을 품고 있으면 그 사악한 빛이 새어나옵니다. 반대로 많이 사랑받은 사람, 많이 사랑하는 사람, 진선미를 추구하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선한 빛이 우러나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에게서는 알 수 없는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어둠이 있다면 그것은 어둠이 강해서가 아니라 빛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 영혼이 가득할 때 어둠이 우리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어둠과의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요, 쉽게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빛을 찾아 나가십시오. 사랑과 진리를 찾아 나서십시오. 그러면 어둠이 물러가고, 어둠의 영역은 축소되어 갈 것입니다. 강력한 빛인 성령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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