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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1.8.22.

요한복음강해 72
겟세마네의 실종


요12:27-33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겟세마네

복음서를 꼼꼼히 읽으면 요한복음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한데 묶어 공관복음이라 부르고 요한복음은 별도로 취급합니다. 여러 가지 차이점들이 있지만 오늘 말씀에서 발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기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27절 본문이 겟세마네의 기도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곧, 목요일 밤에 성전 동쪽에 위치한 겟세마네 동산이란 곳에서 기도하셨던 것을 말합니다. 그때 “내게서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는지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비장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 번 연속 졸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기도 직후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보낸 군속들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중요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이 요한복음에는 없습니다. 27절의 기도가 유사해 보이지만 지금은 세족식도, 최후의 만찬도 하기 전입니다. 장소도 겟세마네가 아닙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이 기도가 비통하거나 비극적인 기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27절의 기도를 분석하면 알 수 있습니다. 원문에는 이 문장에 물음표가 두 개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랴?”가 그 하나입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가 그 두 번째입니다. 그런데 이는 강한 부정입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랴?”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이 뜻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이 의미는 “아니다. 나는 이 때를 위하여 왔다”입니다.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때에 왔다.” 느낌이 완전히 다르지요. 망설임의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주저하는 듯한 그런 태도나 기사들에 대해서 강하게 부정하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여주옵소서 하며 기도하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이 일로 내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는데 어찌 여기에 추호의 망설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사실입니까? 다른 복음서들이 전하는 겟세마네 기도는 다 무엇입니까? 이 때문에 요한복음 연구에서는 역사성보다는 신학만을 중요하게 취급하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둘 다 사실입니다. 다만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뿐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고통과 희생을 강조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자기가 보았던 예수님은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셨는데 이런 식으로 십자가를 회피하고자 하는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겟세마네 기도를 예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면이 아니라 하여 생략해버리고 오히려 기쁨으로 받으셨던 이 장면을 더 부각시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또는 죽으셨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으려 합니다. 32절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여기 ‘들리면’은 높이 올림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골고다도 높고 십자가도 높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십자가를 지상에서 높이 들려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통로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간절히 기다리던 때입니다. 그 죽음의 때는 하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영광스러운 때입니다. 이를 통해 성도들이 장차 들어올 하늘나라의 처소를 마련할 수 있기에 예수님은 빨리 그 날이 오기를 소망했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곧 생각의 충돌입니다. 신앙이 갖는 성격이 바로 그렇습니다. 신앙은 땅의 세계의 논리에 갇힌 그런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늘 세계가 열린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라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에서 고통이 아니라 거기서 싹트고 있는 희망이나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입니다. 패배요 죽은 것 같지만 실은 살았고 우리가 승리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그것이 생각이나 정신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우리 안에서 기쁨이라는 감정을 일으킵니다. 실제 행동으로 이끌어 희생과 심지어 죽음마저도 능히 감당합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관점, 가치, 거기서 비롯된 말이나 언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말과 판단이 우리 감정을 형성하고,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며, 결국 이것이 실제 생명의 풍요로움까지 만들어냅니다. 최근의 책 중에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2017)가 있습니다. 뇌 과학 관련 과학자 리사 팰트먼 배럿이 쓴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감정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에 따라 다르다. 감정은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감정을 만들어낸다. 감정은 당신의 신체 특성, 환경과 관계를 맺으며 발달하는 뇌, 이 환경에 해당하는 문화와 양육 조건의 조합을 통해 출현한다. 감정은 화폐가 실재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실재한다. 감정은 착각은 아니지만 사람들 사이의 합의의 산물이다.”(22)

감정은 분명 존재하지만 이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고, 문화마다 다릅니다. 독일어에는 ‘분노’를 표현하는 단어가 3개가 있고, 중국어에는 5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트카 에스키모인들에게는 분노라는 단어가 없다고 합니다. 타히티인들에게는 슬픔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분노나 슬픔이라는 언어가 없으면 그런 감정도 없습니다. 언어는 사회적 산물입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한국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감정이 다르고, 아프리카나 서구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감정의 결이 다릅니다.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고 나는 생각되어진다이고, 나는 느낀다가 아니고 나는 느껴진다입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말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느낌이나 감정이 달라집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행동이 나오고, 이 습관이 우리 운명입니다. 계속되는 이 책의 교훈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경험 설계자이다. 부정적인 감정개념이 강화되어 있더라도 성인이 되면 자신의 긍정적인 감정을 학습시킬 기회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으므로 나의 현재 상태를 외부 환경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실제 그렇습니다. 동일한 고통이나 환경에 처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비극적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무감각하고, 또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자기 강화의 발판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는 한 공동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일제 침략과 전쟁과 분단이라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야는 그 민족의 문화가 결정합니다. 증오와 폭력의 길로 갈 건지 평화와 상생의 가치로 승화시킬지에 따라 민족의 행복과 불행, 번영과 갈등이 결정됩니다. 대통령 선거라는 것은 한 사람의 인물을 뽑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결정하는 문화적 싸움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폭로전으로 치닫고 구시대 인물이 여전히 행세하는 것은 민족의 불행입니다. 언론은 문화를 형성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 언론은 여전히 퇴행과 탐욕과 분열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긍정과 생명의 언어로 바꾸는 것 그것이 민족과 자신의 생명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언어와 생각을 바꿈으로 우리 감정을 바꾸려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고난에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를 봅니다. 그런 눈을 가질 때 실제 기쁨이 솟습니다. 실제로 행동화되고 죽음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이 생각을 강화시켜 줍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그런 문화적 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말씀이 힘입니다. 말씀이 우리 생각이나 말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임금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의 순간, 세상적으로 보기에는 패배의 순간에 어떤 선언을 하시는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사탄의 패배 선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31) 사탄은 권력자들을 충동질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데, 세상 권력은 성가신 사람 제거했다고 기뻐하는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결정적 승리의 선언을 합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을 세상은 감당치 못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11:33-38) 이 세상의 임금은 더 이상 이들을 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폭력에서 그들의 패망을 봅니다.

예수님의 눈은 미래를 보는 눈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32) 십자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그들이 예수를 증거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수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너머에, 고난 너머에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 인생의 진리도 그렇습니다. 공격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코로나로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그 고통 이면에 자라고 있는 생명의 힘을 믿습니다. 인류는 더 지혜로워질 것이고, 생명의 신비와 풍요로움에 더 근접할 것입니다. 신앙은 그것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매인다면 우리는 쉽게 좌절하거나, 분노하거나, 동일한 괴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천둥소리

사람마다 듣는 소리가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소음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28).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응답하십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예수님과 하나님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온통 하나님을 향하여 있고, 하나님의 기쁨, 곧 그분을 영화롭게 함이 예수님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예수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반응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기적으로 나타나고, 천둥소리와 같은 호응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모습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1:3) 사귐입니다. 사귐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생생한 소리가 들리고 있고 사랑의 사귐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알아보질 못합니다.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29)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소리를 들었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다만 천둥소리로만 착각할 뿐입니다. 지금도 우리 인생에서 이 천둥소리는 들리고 있습니다. 그냥 무심히 자연의 소리로 듣고 흘려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둥소리는 우리를 깨우는 소리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자기 곁을 때렸던 벼락을 하나님의 천둥소리로 들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길을 벗어나 수도원으로 향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에 천둥소리가 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냥 일상적인 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멈추고 그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하나님의 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 소리를 찾아가십시오.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강해 73.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요12:34-43)

이종철

   요한복음강해 71. 한 알의 밀(요12:20-26)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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