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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1.8.15.

요한복음강해 71
한 알의 밀


요12:20-26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씨와 부활

부활이 어떠한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식물이나 나무입니다. 죽음과 다시 삶이 명확합니다. 겨울철에 차가운 추위로 인해 대부분의 식물은 죽습니다. 낙엽을 떨구고 푸르름이 사라집니다. 앙상한 가지만 있습니다. 그러다 봄이 오면 잎이 돋고 꽃이 핍니다. 가을에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마지막은 단풍으로 최후의 열정을 사르고 잎을 다 쏟고는 다시 죽음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1년생 곡식의 모습은 더욱 그러합니다. 메마르고 황량한 죽은 대지에 싹이 돋고 풍성한 수확을 맺는 죽음과 삶이 반복됩니다.

농경사회가 되면서 인류에게 이 재생에 대한 감각은 일찍부터 싹이 텄습니다. 중근동이나 헬라 사회에서는 이것이 신화의 형태로 남았습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그렇게 비판했던 바알 우상은 대표적인 부활의 신입니다. 바알은 천둥 번개의 신으로 비와 바람을 주관합니다. 비는 농사에 절대적입니다. 초근목피의 신인 바알은 중동의 건기인 여름철에 죽습니다. 그러면 이 죽은 신을 깨우러 그의 아내인 아낫이 지하세계로 갑니다. 바알 신이 다시 살아나는 때는 비가 오기 시작하는 가을철 우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중요합니다. 이른 비는 가을철에 오는 첫 비로 이 비가 빨리 그리고 많이 와야 한 해 농사를 기약할 수 있습니다. 늦은 비는 건기 시작하기 전 내리는 마지막 비로 늦게 또 많이 와야 봄농사가 풍년을 이룹니다.

당시 중근동인들은 비가 오는 것을 신의 부활로 보았습니다. 이 무렵이 되면 기우제뿐만 아니라 광란의 축제를 통해 신을 깨우는 의식을 행합니다. 유사한 신앙은 곳곳에 있는데 헬라 사회에서는 페르세포네 신화가 있습니다. 페르세포네 어머니는 데메테르인데 대지의 여신입니다. 어느 날 페르세포네가 지하의 신인 하데스에게 납치를 당했습니다. 딸을 잃어버린 대지의 여신의 분노로 온 땅은 황량한 죽음의 땅이 됩니다. 데메테르가 딸을 찾아 지하세계에 가서 데려옵니다. 그러자 대지는 다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이 딸은 지하세계의 음식을 먹었기에 절반은 대지에서 절반은 지하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때문에 땅에는 봄과 여름과 가을의 풍요와 겨울의 죽음이 반복됩니다. 이 또한 신의 죽음과 부활의 이미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화 속 기대의 성취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은 성서 밖에서도 이미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1년을 주기로 반복하는 그런 부활이 아니라, 더 이상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부활입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부활은 신에게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인간에게, 곧 믿는 모든 자들에게로 확대되었습니다. 단순히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만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생명도 부활할 것을 믿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런 신화들이 꿈꾸는 부활은 이 땅에서의 안녕과 풍요의 소망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세상성과 물질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님이 약속하시는 부활은 이 세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25절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여기에서 ‘생명’은 헬라어로 ‘프쉬케’입니다. 그와 다른 생명 개념이 ‘영생하도록’에서 사용된 ‘조에’ 생명입니다. 헬라적 인간관에서는 사람을 육신과 영혼으로 구분합니다. 육신은 사륵스나 소마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영혼은 프쉬케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나비’란 뜻도 있습니다. 영혼이 나비처럼 팔랑거린다는 뜻인가요? 프쉬케는 한편 대표적으로 사람 목숨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생명, 또는 목숨을 프쉬케 생명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일관되게 영생 또는 생명을 말할 때 ‘조에’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빛이요 생명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할 때 모두 이 조에를 사용합니다. 영생은 ‘아이오니스 조에’,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영원한 조에의 생명을 주기를 원합니다. 단지 프쉬케의 평화나 장수나 번영이 아닙니다. 이것은 언젠가 썩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프쉬케 생명에 집착하면 영원한 조에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프쉬케 생명, 곧 이 생에 대한 미련, 집착, 탐욕을 버리고 미워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요새 유행하기 시작하는 ‘메타버스’와 같습니다. 메타버스는 세계 곧 유니버스에 상응하는 말입니다. 메타버스는 “모든 사람들이 아바타를 이용하여 사회, 경제, 문화적 활동을 하게 되는 가상의 세계”를 뜻합니다. 영화로는 《메트릭스》가 이를 잘 구현하였습니다. 이 메타버스 세계에 빠져 있으면 현실세계를 볼 수 없고 누릴 수 없습니다. 자신이 메타버스 안에 있으며 여기서 추구하는 욕망이 허상임을 알 때, 우리는 메타버스에 매이지 않고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메타버스 세계에서도 여전히 부동산 투기나 자녀교육이나 정치에 목을 맬 것입니까? 프쉬케 생명이 아니라 조에 생명을 추구할 때 오히려 프쉬케 생명도 풍요로워진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씨와 생명

한 알의 씨앗은 부활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씨앗은 작지만 그 안에는 하나의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씨앗을 심어서 농사를 짓거나 과일을 거두어본 사람은 그 신비에 감탄합니다. 조그만 씨앗을 심었는데 여기서 커다란 수박이 열립니다. 참외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죽을 몸을 심는데 거기서 상상도 못할 영화로운 것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이 신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해의 영광... 달의 영광...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고전15:36-41) 썩을 육신의 씨를 심어 하늘의 영화로운 영광의 몸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우주의 탄생이나 인류 진화의 역사가 실은 부활의 역사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어둠과 혼돈과 공허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우주의 법칙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시간과 공간이 생깁니다. 생명이 탄생합니다. 의식을 가진 인간이 탄생합니다. 여기서 끝입니까? 우리는 더 높은 부활의 세계를 꿈꾸고 있습니다. 우주는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갑니다. 물질과 파동이 삼라만상을 만듭니다. 빛과 전자와 양성자의 단순함에서 만물과 고도화된 생명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죽을 것을 심어 썩지 않는 영원한 것을 얻습니다.

씨의 열매

씨 한 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큽니다. 씨 한 알이 썩고 죽으면 그로부터 수많은 씨앗들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은 헬라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 헬라인들은 이방인일 수도 있지만 이들은 지혜를 찾는 사람들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실천적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바로 희생이 가진 힘입니다.

만약 씨 한 알이 자신에게만 충실하려 하여 살찌고, 높이고, 자기 보호에만 힘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토실토실한 씨 한 알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씨앗이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땅속에 묻혀 썪어서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거기서 싹이 돋고,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고, 그 열매 안에서 수백 수천의 무수한 씨앗들을 탄생시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죽음이 영광입니다. 자기가 죽으면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초대교회 순교의 시대에 살았던 터툴리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우리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고문하고 때리고 죽이라. 너희들이 하는 짓이 극심할수록 우리들은 더욱 더 큰 효과를 거둔다. 참으로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다” 실제 핍박이 심했던 곳에서 마치 씨를 뿌린 것처럼 교회는 더 왕성하게 자랐습니다.

헛된 죽음이나 희생이나 고난은 없습니다. 죽음은 생명을 심는 것이고, 고난은 영광의 씨를 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역사의 긴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목도하는 바입니다. 짧은 한 순간만 보면 패배이고 억울한 죽음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면 그것은 마치 씨를 뿌린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죽는 것 같지만 후에 이곳이 꽃동산이 될 것입니다.

예전에 민족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곁에 끼고 읽었던 책 중에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가 있습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고난으로 본 한국 역사’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 역사를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라고 말하며, ‘고난의 여왕’, ‘세계사의 하수구’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고난에 매몰되지 않고 그 고난의 한복판에서 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 그 하수구에 피어나는 구원의 꽃을 동시에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어 냄으로써 생명은 한 단계씩 진화한다. 핍박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상대방을 포용하는 관대함이 생기고 궁지와 형벌을 참음으로써 자유와 고귀함을 얻을 수 있다. 개인에게나 민족에게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 일본의 제국적 침탈이 우리 민족을 더 강하게 만듭니다. 분단의 아픔이 민족을 강하게 합니다. 독재와 야만이 자유를 더 갈망하게 하고 우리를 더 지혜롭게 만듭니다. 고난은 씨앗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을 분노나 절망이라는 밭에서 키우면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씨앗도 중요하지만 밭도 중요합니다. 고난을 주신 뜻에 맞게 반응하고 밭을 일굴 때 거기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길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그러면 존귀함을 받습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조롱이 되는 이유는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존귀케 하십니다. 세상이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듣습니다.
이 은혜가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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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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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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