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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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1.8.8.

요한복음강해 70
이스라엘 왕의 행진


요12:9-19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예루살렘 입성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교회는 전례적으로 부활절 일주일 전을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리들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킨 사건이 결정적이었다고 요한복음은 전합니다. 나사로 부활 사건은 유대 사회에 대단한 충격파를 주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곧 이스라엘 왕으로 환영합니다.

반면에 나사로 때문에 대제사장과 유대 엘리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문제의 기원이 된 나사로마저 죽이려 합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벌어지는 일을 상징합니다. 부활의 현실을 믿고 부활생명으로 죽음을 이기려는 세력이 있고, 부활을 부정하며 죽음의 현실에 순응하려는 자연적 욕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의 싸움이라 규정하였습니다. 오늘도 부활 생명의 믿음으로 죽음의 문화와 현실을 이겨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셔드리는 자가 이 부활생명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의 본질은 예수님이 왕으로서의 등극이고 행진입니다. 13절에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에서 ‘맞으러’란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헬라어로는 ‘아판테시스’인데, 이 단어는 성을 방문하는 황제나 고위 사절단을 맞을 때 사용하는 공식 용어입니다. 아판테시스와 짝을 이루는 단어가 ‘파루시아’입니다. 파루시아는 우리는 재림으로 번역하지만 엄밀히는 ‘나타남’ ‘현현’의 뜻입니다. 만약에 왕이나 고위 사절단이 어느 성을 방문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성 위나 성문에서 맞으며 그들을 환영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예의가 아니며, 그런 행동은 자칫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동구 밖까지, 아니 수십 km까지 나가서 영접해야 합니다. 충분한 환영의 표시입니다. 그 사절단이 출현하는 것을 파루시아라 부르고, 그들을 공식 환영하는 행사를 아판테시스라 합니다.

사절단을 영접한 성의 책임자가 함께 성문을 통과하며 대로를 행진합니다. 주변에 사람들은 꽃을 뿌리거나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호를 합니다. 최대한 그 사절단을 영광스럽게 해야 성공한 영접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헬라 로마의 이스라엘 침략 이후 이런 행진을 여러 번 행했습니다. 헬라의 알렉산더가,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가까이는 빌라도 총독이, 또는 혁명에 성공한 혁명군의 장군이 이런 환영을 받았습니다.

종려 나뭇가지는 통치자를 상징합니다. 무리는 예수를 왕으로서 맞고 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는 찬양에서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왕은 그 힘과 권세로 백성들을 구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뜻합니다. 무리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이스라엘 왕이시여’라 부릅니다.

요한이 종려주일 사건을 전하는 방식은 다른 복음서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입성하시는데 미처 제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나중에야 이것이 영광스런 입성이었음을 알고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대중들보다 제자들이 늦었습니다. 사건이 지나고 난 후에야 아 이것이 영광스런 입성이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 영광을 우리 또한 보고 있습니까?

여기 어린 나귀를 탄 사건도 잘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셨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이 성경에서 예언했던 바로 그 이스라엘 왕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요한복음에 인용되었던 스가랴 9장의 원문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스가랴서에는 ‘겸손하여서’란 단어가 있는데 요한은 이 구절을 빼고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전합니다. 겸손하심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의 입성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로고스, 빛, 생명, 진리, 선한 목자, 하나님 등으로 불립니다. 모두 초월적인 신성을 가진 용어들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전체에서 매우 인간적인데도 주님께서 허용한 칭호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왕’입니다. 매우 인간적이기에 오해도 사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한 민족의 왕인가? 정치적인 왕으로 오셨는가? 이 왕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요한복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먼저는 1장에서 나다나엘이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가 행한 신앙고백입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6:15) 이때는 피하셨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정체도 모르고,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왕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상당 부분 이 논쟁이 있습니다. 빌라도는 집요하게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33, 19:15)고 묻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는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붙입니다. 이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고칠 것을 요구하지만, 빌라도는 이를 거부합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요 19:22)

예수님 또한 ‘이스라엘 왕’이라는 호칭을 받아들입니다. 오늘 말씀이 결정적입니다. 예루살렘 입성하면서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이스라엘 왕’으로서 환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에 호응하듯이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합니다. 14절입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나귀를 타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환호가 먼저입니다. 나귀를 타신 이유는 무리들의 호응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래 내가 너희들의 왕이야! 서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새 왕이 등극하면 그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며 “Long Live the King!” 하며 찬양하는데 마치 그런  장면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예수님이 인정하신 이 왕은 어떤 왕이냐는 것입니다. 아마 무리들이나 대제사장은 정치적인 왕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예수님은 세상의 정치적인 왕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18:37) 이어지는 대화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18:38)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부활의 영원한 왕입니다.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의 왕이 아니라 진리의 왕이요, 풍성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왕입니다. 배타적인 한 민족이나 한 지역이나 한 계층의 왕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왕이며 우주의 왕입니다. 죽을 우리 육신의 왕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왕이시고, 우리 마음의 왕이십니다.

요즘 대통령 선거철이 되자 정말 ‘어중이떠중이’들이 출마선언을 하며 왕이 되겠다고 난리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왕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10장에서 선한 목자의 모델을 보여주셨습니다. 국민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참된 지도자입니다. 나사로를 살리듯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임입니다. 이념이나 이해관계나 욕망을 따라 선택하지 말고 예수님의 모델로 보여준 그런 사람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국민이 행복합니다.

영혼의 왕

왕은 지배자입니다. 왕은 다스리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지배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릴 때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은 동화 형식으로 쓴 로버트 멍어의 책인데 이 책이 예수님이 영혼의 왕이시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마음의 방에 찾아오신 것을 상상하면서 쓴 글입니다. 저자는 먼저 그리스도께 자기 서재를 보여 드립니다. 서재는 바로 우리 생각의 방입니다. 그런데 그 책 선반에는 쓸데없는 책과 보기에 부끄러운 책들이 꽂혀 있었습니다. 얼굴을 붉힌 채 서 있는 저자에게 주님은 유익하지 않고, 깨끗지 않으며, 참되지 못한 것들은 다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선반 중심에 성경을 꽂아 놓으라 합니다. 그렇게 하자 우리 생각의 방이 정돈이 되고 중심이 잡혔습니다.

이번에는 주방을 보여 드렸습니다. 주방은 식욕과 욕구의 방입니다. 저자는 예수님을 앉혀 놓고 평소 자기가 먹던 음식들을 내어놓았습니다. 돈, 학위, 증권 등이 그 주식이었고, 반찬으로는 명성과 행운에 관한 신문 기사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하시며, 우리 영혼의 양식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바꾸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거실입니다. 저자는 이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성경을 보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일과 시험으로 바쁘다 보니 예수님 혼자 거실에 앉아계신 경우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과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음은 작업실입니다. 작업실은 곧 우리의 일터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작업대에는 형편없는 작품이 놓여 있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하시면서 주인공의 손을 잡고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세상일에서도 능숙한 사람들이 됩니다.

오락실은 자기만의 놀이터를 의미합니다. 저자는 이곳에 주님을 모시기 싫어합니다. 왠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불편할까 봐 그랬습니다. 마지못해 주님을 그곳으로 모셨는데 예상과는 달리 매우 즐거웠습니다. 주님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하시며 주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참 행복을 주시기 위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저자의 침실에 들어가서는 주님은 이성 교제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도와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보여드렸던 것은 벽장이었습니다. 벽장 안에는 온갖 더럽고 죽어 냄새가 나는 것들로 가득해서 그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열쇠를 받자마다 벽장을 깨끗이 청소하고 도배까지 하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자가 마지막으로 했던 것은 집 소유권을 주님께 넘겨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도무지 자기 스스로 자기라는 집을 관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자는 주님에게 열쇠를 넘겨드리며 이렇게 간청합니다. “주님 당신은 손님이었고 제가 주인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제가 하인이 되겠습니다. 당신이 저와 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이렇게 명의 이전을 하자 말할 수 없는 평화가 저자의 영혼에 임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집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누가 왕이 되어 다스리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왕되심은 정치나 역사에서도 나타납니다. 히틀러에 저항했던 독일 고백교회의 신앙고백이 바르멘 선언에 잘 드러나 있는데 그 제1항입니다. “성서에서 우리에게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하며 사나 죽으나 신뢰하고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다. 우리는 마치 교회가 그 선포의 원천으로서 이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 이외에 그리고 그와 나란히 다른 사건들, 권세들, 형상들 및 진리들도 하나님의 계시로서 인정할 수 있고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그릇된 교설을 배격한다.”

이는 어떤 이념이, 어떤 물질이, 어떤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왕으로서 모신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내 마음의 왕은 누구입니까? 내 인생을 다스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왕으로 모시는 자에게 풍성한 생명이 임합니다. 풍성한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의 왕으로 임하실 때 주어집니다.


   요한복음강해 71. 한 알의 밀(요12:20-26)

이종철

   요한복음강해 69.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다(요12:1-8)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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