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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1.8.1.

요한복음강해 69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요 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유월절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민족해방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던 날 밤, 하나님의 천사가 애굽의 장자들을 쳤습니다. 이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래서 패스오버(pass over), 곧 죽음이 넘어갔다는 의미로 유월절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어로는 파스카인데 파스카는 유대 명절 중 가장 큰 명절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유월절이 의미 있는 것은 예수님이 유월절이 시작되던 날에 돌아가시고 3일째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유월절과 부활절이 함께 파스카 축제로 기념되었습니다.

이 파스카의 의미를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자주 자기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이 파스카 절기만 되면 반드시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2장에서, 6장에서, 그리고 오늘 12장에서 세 번 유월절이 언급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3년으로 잡습니다.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 누가복음은 마치 예수님이 1년만 활동하신 것처럼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다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셨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유월절마다 부지런히 예루살렘을 방문하셨고 이 때문에 3년 공생애 설이 확정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유월절을 소중히 여기셨을까요? 어린 양의 희생의 피를 문지방에 발라서 온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았다는 상징성 때문인가요? 네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유월절이 바로 예수님의 장례식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피보다는 죽음이 중요합니다. 유월절에는 어린 양을 잡아서 먹는 의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을 유월절 예비일이다, 금요일 오후에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하는데 이때는 바로 이스라엘에서 유월절 용 어린 양을 잡는 시간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으려 하였지만 예수님은 이미 죽으셨고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그 뼈를 꺾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은 유월절 어린 양을 먹을 때 뼈를 하나도 꺾지 않고 먹는 의식(민9:12)의 실현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장례식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내다보며 사셨습니다. 자신이 죽어야 할 때와 장소를 아셨습니다. 그때를 위해서 준비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두려워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90년대 베스트셀러였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가 있습니다. 여기서 모두들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믿는 자는 드물다고 하면서 죽음을 의식해야 인생을 잘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죽을 준비를 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불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하게. 매일 어깨 위에 작은 새를 올려놓는 거야. 그리곤 새에게 ‘오늘이 그날인가? 나는 준비가 되었나? 나는 해야 할 일들을 다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있나?’라고 묻지.”

오늘 읽은 12장부터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의 집에 있을 때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매우 비싼 나드 향유를 가지고 와서는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향유를 바르는 경우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머리에 붓는 경우입니다. 이는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임명할 때의 방식입니다. 마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한 이름 없는 여인을 통해서 받았다고 전합니다. 이 경우는 죽음의 기념과 함께 기름부음 받는 메시야 대관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한 경우는 죽은 자의 시신에 바르는 향유입니다. 이는 나중에 예수님이 죽은 후 안식일이 지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동굴을 찾았던 이유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찾았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향유를 붓는 의식은 바로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예언적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그랬는데 실은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를 인정합니다.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7)

이는 마리아가 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지 않고 발에 부었는지를 잘 설명합니다. 이 비싼 향유를 발에 붓는 경우는 없습니다. 감히 예수님의 머리에는 붓지 못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발에만 부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의미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발에 향유를 붓는 경우는 죽은 시신에 행하는 일입니다. 평생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님은 값비싼 향유를 자기 몸에 붓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이날은 자기 죽음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기 삶에 대한 인정이고 사랑입니다. 나란 존재는 그 정도 대접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11장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12장에서는 온통 죽음의 향기로 가득합니다.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 그러나 이 향기는 더 이상 죽음의 향기가 아닙니다. 이미 11장의 부활 생명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은 더 이상 무기력하거나 절망스런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은 바다와 같이 힘 있고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죽음은 이제 수영장 물과 같이 되었습니다. 관리되고 있고 힘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신 있게 죽음에 대해서, 또 아무렇지 않은 듯이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은 루게릭 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모리 교수를 미치 앨봄이라는 작가가 화요일마다 만나서 나누는 대화 형식의 글입니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모리 교수가 살아 있을 때 행했던 자신의 장례식입니다. 장례식의 우울한 분위기도 싫고 또 정작 사람들이 방문했는데 자신은 아무 말도 듣지도 못하고 대화도 하지 못하는 것이 싫다고 하며 살았을 때 자신의 장례식을 행한 것입니다. 이 장례식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대화를 나누는, 눈물도 흘렸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죽음은 언젠가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이왕 오는 것 때가 되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에게 유월절은 바로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알리는 새소리였습니다.

삼백 데나리온

그런데 죽음이 언급되는 매우 심각한 순간에 분위기를 망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발랐던 향유는 매우 비쌌던 모양입니다. 유다는 300데나리온이나 된다고 언급합니다. 오늘날 가치로 따지면 수백만 원대에 상당합니다. 유다는 마치 자기는 사랑의 사람인 것 마냥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 마리아의 행동을 책망합니다. 유다의 본심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6) 돈이 아까워서 그랬던 것이지 사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말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이나 상황에는 그에 맞는 정확한 말이 있습니다. 정의를 말해야 할 때가 있고, 사랑을 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정의를 말해야 할 때 사랑을 말하거나, 사랑을 말해야 할 때 정의를 말하는 것은 그가 현자라거나 의로운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그 상황에 반대한다는 뜻을 포장해서 말했을 뿐입니다.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유다는 두 가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무엇이든 드리고 싶은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이 향유는 마리아가 평생 모은 것이거나, 자기 결혼비용으로 모아둔 것일 수 있습니다. 매우 소중하지만 예수님에게 드리기에는 전혀 아깝지가 않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예언적 행동이 되었습니다. 명상 철학자 레빈의 말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유일하게 이성적인 행동이다.” 사랑에 답이 있고, 사랑이 이깁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입니다.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곁에 두고도 헛된 것에 마음이 팔려 있습니다. 우리 현대인들 또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 않습니까?. 두툼해지는 월급봉투 때문에, 죽는 길인지도 모르고 마냥 높은 곳에 오르려는 권력욕 때문에,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이념 때문에, 빈 껍데기 같은 자기 명예 때문에 자기 영혼이 어떻게 왜곡되고, 팔리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우리는 현대판 유다들입니다.

그녀를 기억하며

복음서에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거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던 여인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점은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다는 마가복음에 당연히 실렸어야 하는데 마태나 누가복음에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에서 분명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in memory of her)”(막14:9)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이를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요한복음만 마리아란 이름을 언급합니다. 요한은 이런 중요한 명령을 수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의아해했나 봅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이 마리아라 분명히 밝힙니다.

이 사실을 간파하고는 피오렌차라는 여성신학자가 『In Memory of Her』 란 책을 썼습니다. ‘그녀를 기억하며’인데 마가복음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기름부은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부어 대관식을 행한 제사장과 같은 존재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한 예언적인 제자입니다. 예수님도 고맙게 여겨 그녀를 기억하리라 하였는데 초대 교회 제자들이나 공관복음서들이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남성 제자들이 시기해서 그랬을까요? 이 중요한 일을 여성에게 맡기기 싫어서 그랬을까요?

요한은 여보란듯이 그 이름이 마리아임을 밝힙니다. 요한이 그녀의 이름을 기억한 것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기억하는 순간 그 사람은 부분적으로 살아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몸이 사라지는 것이지 관계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사랑하면 그의 일부가 살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수십 년, 수백 년이 흐른 후에는 사람들은 기억 속에만 존재합니다. 누군가가 그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듯 우리 이름을 부르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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