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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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 설교 2021.7.25.

요한복음강해 68
한 사람만 죽으면


요11:45-57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6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믿음의 싸움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11장에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부활시키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도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유대인 중 일부만 믿었을 뿐이며 유대 지도층은 심지어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46절 이하에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열고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3) 가장 위대한 기적이 행해진 그 순간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는 오히려 노골화되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로 결정타를 맞은 죽음의 세력의 저항입니다.

단순히 바리새인들이 완악했다고 표현하기에는 인간이 가진 한계성이 문제입니다.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죽음이 당연하고 현실이라고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를 통해 새롭게 열린 부활의 세계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나 의식이라는 것은 현실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욕망이나 편견이나 집착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현실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반성하고, 행동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그러할 때 생명이 주는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고, 평화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나 부활을 이 생에서 경험하게 된 것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입니다. 이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교리나 전통으로 막습니다. 절대 그럴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진리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자신들의 삶의 기반을 흔들고 있으며, 그러느니 차라리 예수를 죽이는 것이 낫다는 태도입니다.

현실과 의식의 괴리에서 빚어진 것이 바로 정치사입니다.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자본가들에게 힘이 주어졌습니다. 봉건 영주나 귀족들이 이 힘을 억누르려다가 결국 자신들이 거세를 당하고 맙니다. 민중들이 의식이 각성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혁명이 일어납니다. 물론 왕이나 독재 권력이 힘으로 이를 제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안합니다. 새로운 변화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낡은 사고에 갇혀 있으면 도태됩니다. 구한말의 우리나라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현실을 빨리 받아들였던 일본은 처음으로 동아시아 근대사를 이끌어갔습니다.

한국은 이제 선진국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어쩔 수 없습니다. 세계가 그렇게 보고 있으며 우리 경제력이나 문화력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식민지 근성이나 개발도상국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면 더 이상 민족이 발전하거나 세계사에 기여할 수 없습니다. 주인과 노예가 바뀌고, 서열이 바뀌었다면 이것을 인정할 때 발전과 평화가 주어집니다. 현재 일본은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혐한이니 수출 보복이니 하며 저항합니다. 선진국은 그 현실에 맞는 가치관이나 태도가 요구됩니다. 달라고 요구하는 자의 자세가 아니라 나누고 연대하고 이끄는 지도자적 책임이 필요합니다. 정치개혁, 언론개혁은 우리의 의식 바꾸기입니다. 이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과학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납니다. 과학이론이라는 것은 현실을 가장 적합하게 설명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절대불변하는 가치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서 이것이 깨어졌습니다. 속도나 환경에 따라서 시간도 변합니다. 이것이 실제 세계의 모습입니다. 한때는 물질은 입자이거나 파동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물질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모순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공식화한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이론입니다. 이 모순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현대 전자 이론들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 책이 유명해진 이유는 진화론적 선택이 개체 중심이 아니라 유전자 단위로 이루어진다는 관점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개체나 몸이라는 것은 각각의 유전자가 최상의 생존을 위해서 선택한 탈 것, 곧 아파트와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여왕벌과 일벌) 이 현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대비할 수 있습니다.

과학계에서도 현실을 반영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은 그 실상을 잘 폭로합니다. 패러다임이라는 유명한 말을 사용했습니다. “한 시대의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를 말합니다. 이 틀이 잘 안 바뀝니다. 그래서 정치의 영역처럼 혁명이나 투쟁이 필요합니다. 현실 수용 능력이 뛰어나면 평안합니다.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툴 수도 없습니다. 현실을 이기는 장사는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투쟁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역사 안에 부활 생명의 현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 의식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이나 두려움이나 의심과 싸워 부활생명을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죽음에 익숙해진 세력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저항하고, 생명을 가져다주는 자를 죽이려는 반생명적 행동을 합니다. 죽음과 타협하였습니다. 절망의 현실을 살라고 강요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투쟁입니다.

아이러니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한 데는 자기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50절입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민중들을 선동하는 혁명꾼 정도로 보았습니다. 만약에 예수를 왕으로 삼고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군이 개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온 민족이 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정치가의 논리입니다. 예수 한 사람만 제거하면 나라가 안정된다. 이런 식의 논리로 역사에서는 수많은 선각자나 반대자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들은 무심코 진리를 발설하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실제 이들의 말대로 성취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1-52) 예수님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하여 온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탄생하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유대 민족뿐만 아니라 흩어진 이방인들도 함께 하는 교회의 탄생을 말합니다. 이를 문학에서는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 이들은 예수 한 사람만 죽이면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예상 밖으로 기독교라는 새로운 민족이 탄생을 했고, 거꾸로 자신들이 생각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AD 70년에 망하는 결과를 빚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대적자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분입니다. 그들의 음모를 바꾸어 선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분입니다. 시편 2편의 찬양입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1, 4) 그들이 악한 일을 꾸미지만 그 악은 성취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악을 선을 위한 도구로 삼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이러니의 하나님입니다. 악인들의 계획을 허사로 만들어 부끄럽게 만들며, 의인들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만듭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한 사람만 제거하면... 이런 식의 논리로 수많은 의인들을 죽여왔던 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조국 전 법무부장관 가족 재판입니다. 표창장 문제 하나로 온 나라가 요란합니다. 유죄라 규정해도 도대체 그깟 표창장 하나가 뭐라고 이 난리를 칩니까? 이런 식으로 의인들을 제거하고 침묵하게 만들었던 것이 우리 역사였습니다. 그 가족들은 이지매 수준으로 구속당하고 언론의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폭로되고 있는 것은 공격자들의 악입니다. 얼마나 검찰이 자신의 기소권을 임의적으로 사용해왔는가가 드러나며 겸찰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듭니다. 사법권력은 그 동안 법과 양심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했는데 그것은 허상일 뿐이고, 그 판결 안에 자신의 욕심과 이념과 교만을 섞고 있음을 스스로 폭로하고 말았습니다. 정치적 사건의 경우에는 이런 편향성이 강하게 드러났습니다. 모든 판결에는 상식이나 합리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설득이 안 되면 의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굽은 판결을 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래서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국 사건은 이 악을 그대로 폭로하며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언론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진실, 정의, 민족성보다는 그들의 이념과 이해관계가 앞서며, 또한 부끄러움조차 모른다는 것을 자기 펜으로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언론이 그 교만의 칼을 내려놓고 정상화되는 것이 민족의 발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필수적 과제입니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러니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 악을 조롱하고 선하게 바꾸어가는지 우리는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아니 믿음의 투쟁은 여기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아이러니를 완성시켜 가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요셉은 이런 아이러니의 하나님을 경험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요셉은 형제에게 버림받아 죽을 뻔하였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하였지만 모함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지혜로운 능력을 보였지만 오랜 동안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매 애굽의 위기를 극복하고 총리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때에 가나안 땅에 심한 흉년이 들어 이를 계기로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으로 이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요셉은 아이러니의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때에 요셉이 했던 고백들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45:5, 7)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았다며 형제들은 승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기근에 대비하여 미리 보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애굽으로 갔기에 요셉은 좁은 팔레스틴 땅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박국에서 하나님은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합2: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믿음이 무엇입니까? 아이러니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악을 부끄럽게 만들 것입니다. 나에게 벌어진 고난을 바꾸어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이 있어야 불가해하고 험한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강해 69.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다(요12:1-8)

이종철

   요한복음강해 67. 나사로야 일어나라(요11:39-44)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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