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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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1.7.18.

요한복음강해 67
나사로야 나오라


요11:39-44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나사로의 부활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부활의 기적입니다. 죽은 지 4일 만에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단지 죽은 자를 살리는 소생의 기적 정도가 아닙니다. 죽음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이 가졌던 태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흘이 지난 죽음의 상태는 유다인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생명에서의 절대적인 이탈을 의미하였다. 사흘이 지나면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고, 시신은 부패하기 시작하며, 그때까지 시신 주변을 배회하였던 영혼은 육체로부터 이탈한다.”(유대교 랍비)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은 부활의 때 우리들이 듣게 될 말씀입니다. “아무개야 나오라”는 소리에 흩어졌던 우리의 몸들이 다시 결합하고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이 바로 이 땅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습니다.

부활은 인류의 오랜 소망이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이집트의 미라와 피라미드입니다. 피라미드는 왕들의 무덤이고 미라는 장차 입을 부활의 몸을 보관하는 방식입니다. 옛 이집트인들은 인간이 몸과, 영혼에 해당하는 카와 바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카는 혼과 같이 육체의 생명력을 의미했고 바는 의식이나 영혼과 같습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몸이 카와 바와 분리되는 것을 뜻했습니다. 죽으면 카는 분리되어 육체 주변에 머뭅니다. 바는 내세의 신인 오시리스 앞에 가서 심판을 받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몸이 다시 이 카와 바와 결합하는 것을 부활이라 생각했습니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몸을 잘 보관해야 했습니다. 이 결과 미라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피라미드는 카의 놀이터에 해당합니다. 나중에 카와 바가 자신의 몸을 잘 찾을 수 있도록 관 위에 얼굴을 그려놓거나 부장품들을 함께 놓았습니다. 바는 오시리스 앞에서 받는 심판의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신들 앞에서 살인, 폭행, 절도, 강간, 거짓말과 같은 42가지 죄에 대해서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 그런 후 그 심장을 저울에 달아서 깃털만큼 가벼워야 그 진실성이 입증됩니다. 이 심판을 통과한 바는 카를 찾아서 미라의 몸과 결합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몸을 입게 되고 영원한 내세에서 삽니다. 가장 원초적인 부활 신앙의 모습입니다.

베와 수건을 동인 채 동굴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의 모습은 마치 미라의 부활 같습니다. 그들이 그리던 부활이 지금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집트인들이 그린 부활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부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선행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활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시신을 미라로 보관하고 피라미드를 짓는 인간 편에서의 노력이 아닙니다. 부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글이 아니라 소리입니다. 말씀은 공기의 파장이 아니라 로고스입니다. 말씀은 문자가 아니라 살리는 영입니다. 생명입니다.

현대 종교에서 부활 사상을 가장 강력히 붙잡고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실제 서구에서는 부활의 희망 때문에 화장을 하지 않고 매장을 하는 풍습이 여전히 강합니다. 그러나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사는 것이 중요하지 그 상태가 시신이냐 뼈 상태냐 먼지나 연기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이 부활에 대한 기대는 약화되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불멸을 믿고, 영혼이 가는 천국을 믿기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죽으면 이미 영혼이 천국에 가 있다고 믿는 우리에게는 장차 임할 몸의 부활은 좀 복잡해 보입니다. 단테가 그리는 『신곡』에서는 죽자마자 이미 천국과 지옥과 연옥이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몸의 부활 사상에는 히브리적 인간관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몸 없이는 인간이 아닙니다. 몸이 없는 인간은 귀신이거나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플라톤적 세계관이나 몸과 영혼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체계에서는 영혼이 중요하기에 몸에 대한 미련은 그리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이 좋습니까? 교리를 호불호로 결정할 수는 없지만 서구적 이분법이 지배적인 우리에게는 영혼의 천국을 믿고 싶은 쪽으로 기웁니다. 배가 나오고 못생긴 이 몸 다시 살려서 무엇합니까? 부활절도 예수님의 부활 승리를 축하하지만 여기서 우리 몸의 부활을 소망하는 데로 나가는 데는 좀 어색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인지라 몸의 부활을 떠난 천국은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을 ‘잠’에 비유하는 표현에는 몸과 영혼을 분리하지 않는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부활 때까지 인간은 잠든 상태이고, 영혼만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지요.

요한복음 안에는 이런 모순적인 모습이 함께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하니 제자들이 근심에 쌓였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천국을 마련해 놓으셨고, 이제 제자들은 죽는 동시에 바로 이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천국은 부활의 때에서 죽음의 순간으로 앞당겨졌습니다. 더 나아가 살아 있는 이 순간 예수 생명을 내 안에 지니고 있으면 천국은 바로 지금부터입니다.

그림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의 세계에 대해서는 인간은 비유나 상상의 그림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세에 주어질 행복을 어느 때는 부활의 그림으로 설명하고, 어느 때는 영혼이 거하는 천국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문자는 고정되어 있지만 영은 변하고 현실적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에 매여서도 안 되고, 자칫 영에 현혹되어서도 안 됩니다.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또는 현실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변화된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성으로 감성으로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이 성령의 길입니다.

에스겔의 부활 환상

부활이 하나의 그림이요, 또한 실제 현실이라는 것은 성경이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11장과 유사한 그림은 구약 에스겔서 37장의 마른 뼈가 부활하는 장면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의 포로된 땅에서 예언을 했습니다. 에스겔이 37장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했던 때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망한 지 1년 쯤 지난 해였습니다. 에스겔이 주의 영에 의해서 이끌려 간 곳은 마른 뼈들이 뒹굴고 있는 죽음의 골짜기였습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겔 37:3). 그러고는 에스겔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게 합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모이라” 하니까 뼈들이 각각 자기 뼈들을 찾아 모이고 맞추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으로 덮으라”고 명령하니 해골과 뼈 위에 살이 붙어 사람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겔37:9) 하니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환상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마지막 때 있을 부활의 환상입니까? 에스겔이 한가하게 언제 있을지도 모를 부활과 종말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어지는 37장의 말씀이 이 환상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겔37:11) 바벨론 포로로 끌려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이스라엘 족속이 바로 죽은 자들입니다. 이어지는 12절 말씀입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부활은 곧 이스라엘의 해방이고 귀환을 의미합니다.

민족의 부활입니다. 민족 부활은 민족이 집단적으로 부활하는 종말론적 사건이 아닙니다. 포로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가난하고 약한 민족이 강성해지고 지도력을 갖게 되는 민족 비전의 실현입니다. 두 동강난 남북 왕국이 하나가 되는 것이 곧 부활입니다. 계속되는 에스겔 서 말씀입니다.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겔37:22)

하나님 말씀이 바라보고 있는 삶과 죽음,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잘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민족이 허약하고 포로된 것이 죽음입니다. 해방되고 강성해지는 것이 부활입니다. 민족이 두 동강 난 것이 죽음입니다. 그들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민족의 부활입니다. 이번에 우리나라가 유엔 개발기구인 운크타드에서 개발도상국을 졸업하고 선진국으로 인정받은 것은 대단한 사건입니다. 가난했던 민족의 부활입니다. 통일에까지 이른다면, 통일은 아니더라도 남북이 평화와 번영의 길을 함께 간다면 그 또한 민족의 부활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부활은 이미 우리 현실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확대하는 것이 다 부활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민족의 부활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는 이 말씀은 죽음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담대함과 자유함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미 부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생명을 소유한 자는 부활의 능력을 만들어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나사로를 부활시킬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니까? 물론 그렇지요. 기도입니까? 아닙니다. 기도는 단지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믿음입니까? 예 맞습니다. 그러나 믿음보다는 연합이란 말이 더 정확합니다. 41절과 42절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예수님은 기도나 주문이 필요 없습니다. 어떤 주술적 행위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이 하려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즉각적으로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저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온전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생명을 소유한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인간의 한계나, 어떤 어둠의 그림자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영이고 로고스입니다. 말씀한 대로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와 온전한 일치를 이루면 이룰수록 우리는 빛으로 충만합니다.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열매가 있고 능력으로 충만합니다. 부활은 당연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고, 예수와 연합하는 것이고, 예수를 향해 자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소유한 자는 이미 부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은혜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강해 68. 한 사람만 죽으면(요11:45-57)

이종철

   요한복음강해 66. 예수님의 눈물(요11:28-40)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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