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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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1.7.11.

요한복음강해 66
예수님의 눈물


요 11:28-40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현실

오늘 말씀의 분위기는 이상합니다. 연속 강해 설교를 하기에 우리는 그것을 직감합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종말 때에 있을 부활이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이때로부터 현재적으로 주어진 부활생명의 천국을 누리며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들에는 그런 희망과 확신은 온데간데 없ㅅ습니다. 다시 현실입니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있고, 인간은 그 앞에서 절망하고 통곡하고 있습니다. 곡하다, 울다, 비통하다, 썩어 냄새가 난다는 단어들이 그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이나 예수님은 드라마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먼저 살린 후에 이런 말씀들을 전했다면 그 극적 효과는 대단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열광하며 예수를 지지하고 무슨 말씀을 하든 다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정반대의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나사로를 살리는 내용은 43절과 44절 단 두 절뿐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후에도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44)는 말씀으로 끝입니다. 다시 산 나사로가 뛰며 찬양하며 간증하며 사람들의 놀라는 반응들을 소개하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습니까? 다시 산 나사로는 전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말씀의 서술 방식에도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는 기적을 보고 믿으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먼저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보고 믿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는 시대, 기적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여전히 현실이고, 위압적입니다. 우리 모두의 현실입니다.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믿음에 있습니다. 이 믿음은 보지 않으면서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11:13) 믿음이 강한 자는 그만큼의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소유합니다.

믿음은 그냥 관념이나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의식 안에서 실재들을 만들어냅니다. 철학자들은 우리의 의식을 현실의 이미지라고 규정합니다. 칸트는 실재 세계를 알 수 없다는 의미로 물자체라 부릅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이 물자체에 우리 의식이 범주와 형식을 부여하여 우리 머릿속에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 뇌 속에 집어넣는 의식의 한 방식입니다. 이 의식을 영혼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생각을 바꿉니다. 그것이 우리 행동을 이끌어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실제 부활 사건은 간단히 처리됩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미래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실제 우리 삶이고, 이 땅의 대부분 시간은 이 믿음이 만든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무덤 앞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오늘 말씀의 주 무대는 나사로의 무덤 앞입니다. 죽음 앞에 절망에 빠진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잘 묘사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밖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마리아가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 알고 따라나섭니다(31). 예수님을 보자 마리아가 엎드려 웁니다. 따라온 사람들도 함께 웁니다(33). 성경은 놀랍게도 예수님도 우셨다(35)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비통히 여기셨다는 말은 33절과 38절에 두 번 반복됩니다. 그 비통의 정체는 다음에 밝히겠지만 어찌되었든 죽음이 가져온 절망의 모습입니다.

나사로는 ‘죽은 자’(44)라 불리고, 마리아는 ‘죽은 자의 누이’(39)라 불립니다. 죽은 나사로는 수족을 베로 단단히 묶어 놓았습니다.(44). 우리나라도 이제 대부분 화장으로 바뀌었으니 수족을 단단히 묶는 일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관도 좋은 것 필요 없고 기본적인 정도면 됩니다. 죽은 자의 몸은 썩기 시작하고 냄새가 납니다. 마리아가 말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 죽음과 관련된 유대교의 글입니다. “사흘이 지난 죽음의 상태는 유다인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생명에서의 절대적인 이탈을 의미하였다. 사흘이 지나면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고, 시신은 부패하기 시작하며, 그때까지 시신 주변을 배회하였던 영혼은 육체로부터 이탈한다.”

시신의 썩는 냄새를 우리는 맡지 못합니다. 만약 맡는다면 고인에 대한 그리움이 좀 줄어들지 모르겠습니다. 시신을 보지 못하고 차단하는 것이 옳은 장례인지 모르겠습니다. 시신을 가까이 하고 자주 본다면 오히려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 느끼는 우리의 절망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부활생명을 가지고 싸워야 될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무시하고 허황되면 안 됩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예수님이 심히 비통해하셨다는 두 번의 표현과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33)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38)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 안타깝고, 마리아의 처지가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고 비통해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제자들은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 말한 바 있고, 유대인들도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하고 말합니다.

여러 죽음이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더 마음이 아픕니다. 인생을 달관한 것 같은 공자에게도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은 큰 슬픔이었습니다. 공자님이 가장 아끼던 제자는 안회였습니다. 안회는 학문을 즐길 줄 아는 자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32세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나이 60 넘은 공자는 너무 슬퍼 “하늘이 나를 버리셨다!”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안회를 위해 통곡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를 위해 통곡한단 말이냐?” 안회의 죽음을 아들의 죽음처럼 안타까워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절망감을 느꼈을까요? 그런데 요한복음 11장의 문맥상 그런 판단을 할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마르다를 책망하며 부활신앙을 가질 것을 요구하셨던 주님이 죽음 앞에서 절망의 모습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비통히 여기셨다’로 번역한 ‘엠브리오마이’는 ‘분노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통은 절망의 비통이 아니라 분노의 비통입니다. 이는 인간을 절망으로 모는 죽음에 대한 분노입니다. 여전히 그 죽음의 위력 앞에서 신앙으로 이기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생을 향한 분노입니다. 이와 유사한 분노가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입니다. 사람은 연약합니다. 잘못된 길로 이끌고 휘둘리게 만드는 것은 탐욕이나 이념이나 권력입니다. 보다 근원적인 것들에 분노하면 우리는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변화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은 매우 뜻밖입니다. 로고스이고 생명이고 부활이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다니! 예수님은 인간이 당하는 죽음의 현실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삶의 한복판에서 부활을 외치고 계십니다. 방관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지만 사륵스가 되셨습니다. 사륵스는 중립적 의미의 몸(소마)보다 더 세상성에 얽혀 있는 단어로 육으로 번역됩니다. 말씀은 완전히 진흙덩이가 되셨습니다. 욕망과 거짓에 휘둘리기 쉬운 존재가 되어 그 유혹 가운데서 싸우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신이시기에 구름을 타고 가실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걷다가 피곤하셔서 우물가에 앉아서 쉬셔야 했습니다. 배고프셨고 목이 말라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마실 물 좀 달라고 부탁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고통 또한 철저히 겪으셨습니다. 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19:34)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참하나님이시면서 참인간이 되셨다는 기독론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아픔에 충분히 공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십니다. 이것이 기존 인간 역사에 등장하는 어떤 신에 대한 이론을 다 파기해버립니다. 죽음은 이제 신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은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신입니다. 그러면서 함께 문제를 풀어가자고 합니다. 내가 먼저 갈테니 내 뒤를 따라오라고 부르십니다.

신은 이전처럼 기도하고 정성을 들이면 들어주는 복덕방망이 신이 아닙니다. 그런 기적은 가끔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적이라는 요행수를 믿고 살아가길 원치 않습니다. 비주체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고, 기적을 만들어내고, 부활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체적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그 가능성을 몸소 인간이 되어 실현하신 것입니다.

네가 믿으면

부활의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믿음의 힘입니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믿음의 놀라운 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를 향하여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고 말씀하시며 믿음이 나사로를 다시 살릴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가진 힘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현대철학에서도 믿음의 힘에 대해서 인정합니다. 무신론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존재와 사건』, 『사도 바울』이라는 책에서 믿음의 힘에 대해서 역설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건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서 평가할 때 그 사람이 행한 일과 선택에 의해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이것을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인상이나 느낌이라는 것은 결국 그 사람에게 일어났던 사건의 결과물입니다. 이는 개인이나 조직이나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랭 바디우의 유명한 말은 “사건은 은총이다.”는 말입니다. 우리 앞에 사건이 맥락도 없이 은총처럼 쏟아집니다. 그 가운데는 진리인 것도 있고 거짓도 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선택할 뿐입니다. 믿음은 모험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알랭 바디우는 여기서 기독교의 믿음, 사랑, 소망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유로서의 주체가 사건의 은총을 부여받는 것을 우리는 주체화, 혹은 믿음과 확신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그리스도라는 사건에 충실한 것이다. 희망은 그러한 여정 안에서의 확고부동함이라는 준칙이다.” 이 사건이, 이 선택이 옳다는 확신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행동으로 지속해 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가 곧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계속해서 요청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서 일어나는 말씀 사건이 실재다. 이 확신을 가져라. 그러면 기적을 볼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부활 생명이 너희 안에 있고, 장차 실제로 부활의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과 믿음으로 싸웁니다. 믿음으로 부활생명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요한복음강해 67. 나사로야 일어나라(요11:39-44)

이종철

   요한복음강해 65. 부활 생명의 시작(요11:23-27)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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