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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 설교 2020.12.27.

요한복음강해 39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


요6:14-21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예수님의 기적이 두 번 연거푸 이어집니다.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바로 이어서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위를 걸으시는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기적은 기적으로 끝나지 않고 해석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논쟁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 됨의 능력을 보이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 기적을 통해 깊은 영적 의미를 전해주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을 충분히 묵상해야 합니다. 겉모습만 보고는 엉뚱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천양지차의 결론이 주어집니다. 만약 어떤 고통스런 일이 나에게 벌어졌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냥 사건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거나 재수가 없어 그렇게 되었다고 해석한다면 우리에게는 절망과 후회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하거나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연단의 계기로 해석한다면 고통은 신비요 감사가 될 것입니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해석하는 존재이고 그 해석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됩니다.

출애굽의 하나님

예수님의 두 가지 기적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말씀 곳곳에는 그 해석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4)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는 이들은 모세 메시야를 연상했습니다. 신명기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였던 사건을 연상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이 두 가지 기적은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4)가 그 시간적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민족해방절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켰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기적들을 통해 출애굽을 연상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도 거짓 메시야들이 많았습니다. 그들도 출애굽과 관련된 기적들을 행했습니다. 예컨대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이나, 광야로 사람들을 몰고 가거나,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기적이 이루어질 것이라 하여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이에 더하여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 기적 또한 출애굽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홍해 바다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마른 땅처럼 걷게 했던 그런 출애굽의 하나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찬양입니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사51:9-10) 바다를 다스리는 기적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출애굽 해방의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기적들은 당시 유대 백성으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해방하시기 시작하셨다는 사인으로 보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마치 메시야의 만찬이라는 정치적 사건으로 해석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축하의 잔치가 일어나는데 종말 때에는 이런 큰 잔치가 일어날 것입니다. 마치 그 잔치가 현재에 이루어지며 해방운동이 시작된 것으로 유대 백성들은 해석하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취했던 행동이 1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이는 예수님에게는 매우 위기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대하던 그런 정치적 메시야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오해를 피하시려는 모습은 15절의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기대의 차이는 예수님 공생애 내내 백성들과 예수님 사이를,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책망하기도 했고, 제자들은 예루살렘 입성시 서열 다툼을 했습니다. 유다가 예수를 팔려고 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민중들을 선동하지 않았고, 민중들은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예수 운동에서 죽은 것은 예수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수의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정치에서 힘은 강력한 유혹이며 실제적인 무기입니다. 힘을 갖지 않은 정치권력, 국민들의 지지와 그 힘을 세력화하지 않는 정치권력은 허상일 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올바른 사람이 힘을 갖는 일입니다. 현 정부가 어느 정도 개혁성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촛불시위를 통한 국민들의 지지와 그것이 국회라는 입법권력으로 현실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존 기득권 세력의 저항은 엄청납니다. 이번 주에 벌어졌던 검사, 판사, 언론의 일련의 사법 난동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들은 법을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법을 이용하는 법 기술자들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소하고 판결을 내리니 이것이 불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정치는 생활입니다. 이들의 행태를 보면 자신들의 사법권력을 이용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약자나 가난한 서민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불법기술을 사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여전히 통용되고 있습니다.

세상 정치에서는 정의로운 자가 힘이 없으면 당합니다. 이와 관련된 교훈적인 말들이 많습니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라 불리는 데리다의 말입니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군주론』을 썼던 마키아벨리의 말입니다. “무장한 예언자는 누구나 승리했으나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패망했다.” 현실정치에서는 정의로운 자가 권력을 갖지 않거나 자신이 가진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기득권자들에게 당합니다. 한국의 근대사는 기득권자들이 권력을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이끌어온 역사였는데 이제 그 균열이 생기고 그 힘이 약화되었습니다. 지금 그 추한 모습으로 노골적으로 저항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그들의 위기감의 반영입니다.

힘과 권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권력의 길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기적들을 보며 예수님을 통해 권력을 창출하기를 원하시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권력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를 무너뜨리기 원하셨습니다. 섬김과 십자가가 바로 권력 자체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정의가 아니라 영원한 정의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정의라고 할 때 사실 한쪽 편의 이익을 좇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다수이기 때문에 옳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특정 민족의 해방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해방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해방만 추구하셨다면 예수님은 영원한 성자가 아니라 민족 영웅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권력과 물질의 획득을 통한 자유가 아니라 인간들이 가진 죄와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진정한 자유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욕망의 결정체가 아니라 그 욕망을 깨뜨리고 부수어 참다운 인간성의 기준을 세우시는 계시자입니다.

이러니 누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누가 예수님을 지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길은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피하여 혼자 산으로 들어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

그런 점에서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도 잘 해석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배를 몰고 갈릴리 호수 한가운데를 지납니다.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서 노 젓기가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사람이 그 거친 바다 위를 걸어오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예수님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중력을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가까이 오시더니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20)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내니”는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 말을 신적언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지칭할 때 이런 식의 용어가 잘 사용되었습니다. 이 기적은 바로 예수님이 바다를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드러냅니다. 바다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던 출애굽의 하나님임을 보여주신 기적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성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느냐며 제자들이 환상을 보았거나, 안개 속에서 유령을 본 것처럼 착각했다고 해석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난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짜장면 배달을 왔습니다. 소년이 그 말씀을 듣고는 목사님에게 “에이 구라. 사람이 어떻게 바다 위를 걸어.”하며 조소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목사님이 이렇게 반격했습니다. “야 그러면 하나님이 물에 빠지면 되겠냐?” 소년이 “어 그거 말이 되네!”하며 수긍하더랍니다. 예수님이 만약 하나님이시라면 물에 빠져 죽으면 안 되지요.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기적이라는 수단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 기적이 진짜냐 지어낸 것이냐 따지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떻게든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이런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이셨다고 믿을 뿐입니다. 초점은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간에게는 설득할 수 없으니 단지 기적이라는 방편을 이용하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기적이 오늘날의 시대에도 일어날 것이라 믿거나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서도 안 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인간을 돕는 방법입니다. 어느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 도끼를 물에 빠트렸습니다. 이 나무꾼이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를 했습니다. 도끼가 떠오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옛날 동화처럼 산신령이 금도끼와 은도끼를 들고 나타날 것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기도에 전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고 또 하나님이 응답해주시지 않자 나무꾼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수영을 배운 결과 그는 물속에 들어가 자기 도끼를 꺼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무꾼이 빠뜨린 도끼도 꺼내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수영을 배우다 건강도 더 좋아졌습니다. 또 다른 나무꾼은 물속에 들어갈 수 있는 기구를 개발했습니다. 역시 이 사람도 많은 다른 도끼들을 건져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기구를 다른 산업에 적용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지어낸 우화지만 우리 기도가 그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는 그런 허황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아무것도 바랄 수 없기에 더 강해집니다. 유태인들을 보면서 느낀 건데 그들은 강합니다. 조그마한 땅을 가진 이스라엘이 아랍의 수억 명을 능히 당해 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의 침묵 때문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수백 만의 자기 동포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갈 때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고난 중에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자 스스로 강해지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기적은 사람을 약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적에 매달리는 사람이 되어서 요행수에 빠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풍랑과 파도를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의 선장되시며 바다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 말고, 포기하지 말고 땅 끝까지 항해하십시오.

이번 코로나 상황에서 우리는 속히 하나님이 성령의 바람을 불으셔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다 태워버리고 날려버려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침묵이 인류를 더 강하게 만듭니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우리 인류 유전자가 더 강하게 진화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응하는 과학 기술의 능력이 더 발달할 것입니다. 또 그동안 생태계를 귀히 여기지 않고 일방적으로 착취했던 것을 반성하며 서로 공존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진정한 교회와 예배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개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인류는 강해지고 진화합니다.

예수님의 기적 때문에 우리 또한 기적 신앙에 매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이 바다를 잠잠케 하고 바다 위를 걸으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좌절하지 마십시오. 도전하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며 버티고 싸우다 보면 어느새 소원의 항구로 들어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107:29-30) 금년 한 해를 이끌어오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년 새해 우리가 원하는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신년주일예배설교. "치유와 회복"(말4:2)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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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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