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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12.20.

요한복음강해 38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요6:1-13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예수님 공생애 기간에 행하신 기적들 중에 최고의 기적은 무엇일까? 저는 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행하신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아이들과 여자까지 합하면 수만 명이 될 것인데 그들 앞에서 빵이 끝없이 쏟아지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넓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고 그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어느 기적이 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 스테인드글라스의 그림이 바로 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오랜 세월 지켜보았지만 질리지 않고 마음을 풍성하게 합니다.

빌립의 빵

이 기적은 갈릴리 호숫가의 한 낮은 둔덕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억압과 수탈, 가난과 질병에 찌들린 민중에게는 예수님이 희망이요 위로였습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면 해변을 걸어서든 다른 배를 타고서든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인가나 먹을 곳이 없는 한적한 곳에도 찾아가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기 “큰 무리”란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5) 사람들이 몰려오는 장면은 가슴뭉클하게 만듭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막6:34)고 전합니다. 지난 세기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좋은 말씀이나 강연이 있으면 어느 곳이든 찾아갔습니다. 요즘은 그런 열정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편해져서 그런가요? 어디에서든 쉽게 들을 수 있어서 그런가요? 어찌 되었든 말씀에 대한 갈급함은 사라졌습니다. 경제 정치적으로 어렵고 육신의 배가 고플 때 사람들은 더 영적인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산상부흥회가 일어났습니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통쾌하게 유대 지도층들을 공격하는 말씀에서 민중들은 희열을 느꼈습니다. 율법이 새롭게 해석될 때 민중들은 놀랐습니다. 하나님나라가 곧 다가오고 있다는 희망으로 생생했습니다. 무리들은 행복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식사할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말씀이 좋아도 배부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무리들을 인가로 보내어 먹게 하기에는 먼 곳이고 이 많은 숫자를 그렇게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들을 먹이시기로 하셨습니다. 기적을 바로 행하시면 되는데 예수님이 빌립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미 계획이 서있었지만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서 물으셨다고 설명합니다. 빌립은 위기 상황에서 맞는 답을 제출할까요? 사실 이 시험은 우리들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빌립은 예수님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이다”(7)고 답합니다. 빌립은 재빨리 사람 수를 어림 계산했습니다. 조금씩 나누어 먹더라도 2백 데나리온이 든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오늘날 노동자 하루 품삯을 대략 5만 원 정도로 치면 1천만 원 정도입니다. 빌립은 매우 현실적인데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현실적인 것은 좋습니다. 계산도 못하고 허무맹랑한 것보다 낫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히려 이런 현실적인 마인드입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을 과신하여 신앙인들은 허무맹랑해지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지 하다가 안 좋은 결과 앞에서 당황해 합니다. 건물만 올리고 빚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겠지 하다가 낭패를 보는 교회들이 2000년대 들어서 많아졌습니다. 믿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왜 이전에는 됐는데 지금은 안 되지 하면 안 됩니다. 이전에도 사실 계산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밀물 때였고, 교회 성장기였습니다. 사람들도 순수하고 헌신적이었습니다. 은연중 그런 계산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아무런 대책도 없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지 하며 생각없이 모이면 안 됩니다. 대부분 문제가 되는 교회들은 오히려 열심이 많은 곳들입니다. 하나님은 손쉬운 이성의 길을 열어주셨는데 왜 구지 어려운 믿음을 하나님께 요구합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계산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고 그 이성을 따라서 도와주십니다. 기적은 예외상황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뜻으로 주셨지 기적을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빌립의 잘못은 계산을 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계산을 하고는 좌절했다는 데 있습니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계산은 하되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믿음을 갖되 방도를 찾으십시오.

안드레의 빵

반면에 안드레는 다른 방식을 취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9) 오병이어라고 불리는 기적의 계기가 된 헌신입니다. 안드레는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한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어린아이의 작은 도시락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빌립보다는 낫습니다. 빌립은 단지 머리로만 계산했을 뿐이지만 안드레는 발로 움직여 작지만 먹을 것을 가져왔습니다. 출발은 바로 여기서부터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있으면 하나님은 이 작은 헌신을 받으셔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안드레는 신앙인들이 위기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문제가 너무 거대하다고 하여 좌절해 있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하나를 출발해야 합니다. 그 하나가 쌓여 언젠가는 결국 큰일을 이룰 것입니다. 제가 가끔 말씀드렸던 예화가 이 말씀에 적당한 해석 같습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고사성어 중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 있습니다. 중국의 태행산과 왕옥산 기슭에 우공(寓公)이라는 나이 90세 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노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을 위해 봉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을 가로막고 있는 태행산과 왕옥산을 옮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두 산이 마을의 통행에 지장을 주고 마을의 발전을 막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결심을 한 우공이 시작했던 일은 고작해야 그의 가족들과 함께 산에서 흙을 퍼다가 바다에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우공을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언제 저 태산같이 큰 산을 다 옮길 수 있겠느냐는 비웃음이었습니다. 그때 우공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못 이루면 내 아들이 이룰 것이요, 내 아들이 못하면 그 손자가 이을 것이니, 그러다보면 산은 언젠가는 모두 없어질 것이요.” 이 말을 듣고 대경실색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두 산의 산신령들이었습니다. 산신령들은 곧 바로 하늘의 천제에게 가서 우공이 우리 산을 없애기 전에 먼저 옮겨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산이 원래의 자리에서 먼 곳으로 옮겨졌다는 고사입니다.

중국인의 만만디 정신을 보여주지만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작은 하나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작은 것이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작은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놀라운 일을 이루어내실지 모릅니다. 문제는 어떻게든 시작하는 것이고, 헌신하는 것이고, 작다고 실망하지 말고 확신을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작은 헌신이 만들어낸 놀라운 결과는 19, 20세기에 풍미했던 자유주의자들의 해석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며 이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중 파울루스의 오병이어에 대한 해석은 귀담아 들을 만합니다. 예수님 앞에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배고파하자 한 어린아이가 자기 도시락을 주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자신이 가진 것은 이것뿐이니 이거라도 필요하면 쓰시라고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자기들이 몰래 감추고 있던 먹을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것들을 꺼내어놓고 나누니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오병이어는 생산의 기적이 아니라 나눔의 기적입니다. 나눔이 기적을 만듭니다. 우리 사회에서, 또 전세계적으로 빈곤층이 있고 기아선상을 해매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2018년도 유엔 발표에 의하면 세계 기아인구는 8억 2천만 명에 달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식량생산이 모자라서 고통을 겪습니까? 아닙니다. 식량생산량은 모자라지 않습니다. 선진국은 남아돌아서 버리고 동물 사료로 사용합니다. 반면에 제3세계는 정치가 불안하거나 기후변화로 인해 식량이 제대로 생산되거나 보급되지 않습니다. 잘 나누기만 해도 풍족히 먹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2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단 한 번 일어났던 기적입니다. 그 이후 그런 기적은 재연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 딱 한 번 있었던 기적을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그런 점에서 이 말씀을 나눔으로 적용한다면 우리는 현대사회에서도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과 나눔이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립니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빵

빌립은 실패했습니다. 안드레는 절반만 성공했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풀밭에 앉게 하였습니다. 여기 앉게 했다는 말은 팔꿈치로 딛고 비스듬히 누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저녁 만찬을 하기 위해 고대 중동인들이 취하던 식사자세 입니다. 먹을 것이 전혀 없는데 이들은 기대고 앉아 식사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 수가 오천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대단한 숫자입니다. 모두가 숟가락만 들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하늘을 향해 축사, 곧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형적인 기도는 “오 우리 주 하나님, 땅으로부터 먹을 것을 내신 만왕의 왕께 감사드리나이다”입니다. 그 기도를 드린 후 떡과 물고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마 제자들이 나누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구니에서 떡과 물고기가 끊임없이 나옵니다. 5천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을 정도입니다. 엘리야로부터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던 사렙다 과부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때 기근이 끝날 때까지 병의 기름과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구니에서도 끊임없이 먹을 것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분명 공생애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때는 돌로 떡덩이를 만들라는 사탄의 유혹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책의 ‘대심문관’에서 심문관은 예수님에게 사형판결을 내립니다. 빵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를 예수님이 거절하셨기에 대중은 그런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며 예수님이신 줄 알면서도 그런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은 대중들에게 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굶주린 것을 부모가 못 견디듯 민중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빵에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굶주리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필요를 넘어 우리의 욕망의 도구로 예수님을 이용하려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 일용할 양식은 절대적으로 채워주시겠다는 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막16:37)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주리지 않도록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십시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우리의 주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2천 년 전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또 매일매일의 주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먹이시는데 말씀으로 먹이십니다. 신명기 8장 3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이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의 양식이라면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말씀의 양식은 매일 먹어야 합니다. 말씀의 양식은 빵을 구할 수 있도록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말씀은 우리로 믿음을 가지고 절망하지 않고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말씀은 빵으로 위협하는 세상에 대해서 우리로 능히 버티고 싸울 수 있는 무기입니다. 이 말씀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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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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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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