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 교회
  Home > 말씀이살아있고 > 설교동영상  

     
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12.13.

요한복음강해 37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요5:41-47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사람의 영광

오늘의 말씀 주제는 영광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근본적 이유는 그들이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취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근원은 두 군데입니다. 41절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는” 것과 44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은 ‘영화, 빛남, 구별됨’이 아닙니다. ‘찬사, 인정’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주요한 목적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영광입니다. 사람들의 인정이고 고대 로마 사회에서는 ‘명예’에 해당합니다. 어떤 운동 경기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대단한 부가 아니라 단지 ‘월계수’관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이것을 가장 큰 명예로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명예 때문에 목숨을 걸기도 하고 목숨을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은 무언의 부와 권력을 획득하는 것과 같습니다. 명예로운 사람의 말이나 결정은 영향력이 있습니다. 로마 황제정을 열었던 시저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로마에 평화를 가져다주며 얻었던 것은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이었습니다. ‘존엄한 자’라는 뜻의 명예를 원로원이 수여하였는데 나중에는 이것이 이름처럼 불렸습니다. 가장 큰 명예입니다. 다른 어떤 직책보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이름의 권세로 황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명예, 또는 영광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신이나 어떤 진리의 행위로부터 나오는 영광이 아닙니다. 사람의 칭찬과 인정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광은 불안하고 근거가 굳건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지하느냐에 따라, 또 사회적 환경이나 기대치에 따라 영광이 되기도 하고 불명예스럽게 되기도 합니다. 한때는 추앙받던 영웅이 후대에는 악의 화신으로 전락하는 것을 역사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영광일지라도 영원한 가치와 접목되지 않으면 그 영광은 허망하게 사라집니다.

사람의 영광과 관련하여 멋있는 말을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윤석렬 현 검찰총장입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외압이 있었음에도 수사를 충실히 하다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했습니다. 그때 청문회장에서 했던 유명한 말이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였습니다. 이 말을 사람의 인기나 정권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법과 정의를 위한 담대함으로 우리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를 칭찬했고 제 설교에서도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달랐습니다. 그의 말은 일반 국민이나 권력에 있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검찰이라는 조직에 충성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결국 이 또한 협소한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에게서 날지라도 영원한 가치에 근거하지 않으면 그 영광은 허망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언론이라는 허상입니다. 더군다나 한국 언론이 주는 영광은 조심해야 합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영광 받아야 할 자를 깎아내리고 그렇지 못한 자를 영광스럽게 만들려 합니다. 자신들의 이념이나 이해에 맞는 자는 높이다가 이용가치가 없으면 다른 말로 갈아탑니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습니다. 꽃이 붉어도 열흘을 못간다는 말입니다. 한때의 영광에 취하다가는 그 나머지 세월마저 망치고 맙니다. 개나리는 꽃만 기억하지 그 나무나 잎사귀를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영원한 가치와 연관된다 할지라도 사람으로부터 나온 영광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민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인간들이 얻는 대부분의 영광은 나라나 민족에 대한 헌신에서 나옵니다. 나라의 해방을 위해서 싸웠던 독립군들은 영광과 명예를 얻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길을 가던 일본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원수입니다. 영웅과 테러리스트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서 싸우는 자들은 그들의 눈에는 영웅이지만 이스라엘의 눈으로는 테러리스트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주는 영광의 한계입니다. 아무리 민족일지라도 이것이 정의, 인도, 보편이라는 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면 일시적이고 지협적이 됩니다. 영원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호응에 맞춰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행하고, 빵을 주었다면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 민족주의에 영합하여 민족의 해방을 이야기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정치적 메시야의 역할을 했다면 이들은 거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44절의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43절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유대 민족의 부흥을 위한 메시야가 나오면 백성들은 이 사람에게로 몰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했습니다. 그 의미는 일단 사람들의 기대나 취미나 소원에 부응하는 영광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가진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그런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야 썩지 않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영원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십자가의 길을 갔기에 예수님은 당시에 인기가 없었고 패배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 천년의 시간 동안 영원히, 지구상 곳곳에서 그 영광스런 이름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길을 구하는 자는 외롭습니다. 고난도 있습니다. 꿋꿋이 자기 확신을 가지고 가야합니다. 맹자의 대장부신앙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맹자』의 ‘등문공’ 편에 나오는 대장부의 정의입니다. “천하라는 넓은 거처에 살며,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하며, 지지를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 그 도리를 행하고, 지지를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리를 행한다. 부귀의 유혹도 그 마음을 더럽게 할 수 없으며, 가난의 어려움도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지 못하며, 위세나 무력도 그 마음을 굽히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일컬어 대장부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의 기대나 영광에 의지하다가는 내 인생에 대한 확신이 사라집니다. 언제 사라질지 몰라 불안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내가 보는 눈이 더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이런 태도로 나아갔습니다. 당시 소수요 비주류였지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길로 갔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유대 민족을 즐겁게 하였더라면 바울은 그렇게 심한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대신 하나님의 진리는 왜곡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현재의 영광이 아니고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현재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역사의 무대에서 곧 잊히고 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옳고 진실이기에 시간이 흐른 미래에서만 이해될 수 있고 받아들여집니다. 지금 빛나고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했던 바울의 복음입니다.

우리를 고발하는 자

우리의 행동이 사람으로부터인지 하나님으로부터인지를 평가하고 고발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고발하고 있는 것인지 지지하고 있는 것인지 잘 해석하질 못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이면서 성서주일이기도 합니다. 성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적용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고발하고 정죄했는데 모세의 율법에 근거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모세가 너희를 고발할 것이라 말씀합니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 유대인은 예수님을 고발하고 예수님은 유대인을 고발합니다. 누가 옳습니까? 성경의 해석 문제인데 이 문제 때문에 우리 기장 교단도 시끄럽습니다. 포괄적 차별 금지법과 관련하여 동성애 찬반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한쪽에서는 성경에 문자적으로 동성애는 죄라 하였기에 동성애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반대쪽에서는 그것은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고 동성애가 선택에 의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주어졌기에 하나님의 생명 사랑에 근거해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누가 옳습니까?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맞다고 해석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도 억울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분명히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였고 예수님이 그것을 어겼기 때문에 죄라고 정죄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성경 해석의 원리가 상충합니다. 예수님은 문자보다는 왜 하나님께서 이 법을 제정하셨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펴 율법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은 “옛사람에게 말한 바” 하며 모세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그 핵심을 보면 결국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생명에 근거한 해석이었습니다. 성경 문자는 시대적 한계들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뜻하셨는가를 계속해서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설교이고 신학입니다.

어느 황량한 정원을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 쓸모도, 아름다움도 없는 정원을 왜 지키느냐고 물으니 병사들은 오래전부터 규칙으로 전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래 전에 어떤 왕비가 그 정원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심고 분수를 내었습니다. 그곳은 왕과 왕비가 가장 사랑하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동물이나 사람들이 망치지 않도록 병사들로 하여금 감시를 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왕비도 죽었습니다. 왕국도 사라졌습니다. 정원은 꽃들마저 사라져 황량한 벌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병사들은 오래된 규칙이라고 하여 여전히 보초를 서고 있습니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어야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자신 있게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언한다”(39)고 하고 모세가 “내게 대하어 기록하였다”(46)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나 생명은 어떤 개념이나 문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인격 자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모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고 성경이 나를 증언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성경 해석의 근거는 예수님입니다. 십계명을 읽어도 우리는 문자로 해석하지 말고 예수님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를 정죄하거나 부자유하게 만들거나 우리를 폭력이나 배타적 태도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사랑으로 자유함으로 이끕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다면 그 성경은 우리를 가시처럼 찌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로 살게 합니다.


   요한복음강해 38.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요6:1-13)

이종철

   요한복음강해 36. 나의 증언자 따로 있으니(요5:31-39)

이종철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Puresunn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