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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12.6.

요한복음강해 36
나의 증언자가 따로 있으니


요5:31-39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증언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결정들을 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합니다. 작은 여행의 결정에서부터 큰 인생의 결정까지 수많은 결단들을 통해 우리 인생이 만들어져갑니다. 그 결정에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있지만 후회스런 결과를 남기기도 합니다. 자기 인생에 심각한 변화를 야기하는 결정을 했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장애와 고난을 맞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결정이란 것이 개인적인 문제로 끝난다면 감수할 수 있겠는데 대부분 사회적인 것과 연관되기에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집니다. 이 비난을 뚫고 원래 계획했던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외부의 비난은 견딘다쳐도 내 안의 비난, 곧 자책감이나 후회는 끝없는 수렁으로 나를 몰아넣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이 내가 함부로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내 지혜가 모자를지언정 최선을 다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어떤 탐욕이나 불의에 기초해서 내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이나 말씀에 근거해서 내린 결정이었고, 기도하면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그랬다면 자신의 결정이나 인생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확신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것이다는 말이 바로 그 확신의 언어들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로운 길을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용하려만 합니다. 병자를 치유하는 착한 일을 하였는데 병자는 오히려 예수님을 밀고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예수를 박해합니다. 예수님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신성모독죄로 죽이려 합니다. 저쪽은 수가 많고 예수님은 혼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당합니다. 확신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자기 편이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옳다고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 32절입니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37절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예수님의 길과 행동을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내가 내 인생을 변호하면 힘이 없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곁에서 나를 변호해주십니다. 지금 거대한 세력과 싸우고 있는데 옆에 나의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연약한 인간 변호사가 아니라 전지전능한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3:6)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천만 안티가 여러분을 댓글로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검사가, 사탄이 여러분을 고소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여호와가 다윗의 방패요, 다윗의 영광이요, 다윗의 머리를 드시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힘내세요.”가 격려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힘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서 더 짜내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괜찮아, 잘하고 있어.”가 새로운 인사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 곁에서 우리를 격려해 주십니다. “힘들지 내가 도와줄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변호하였듯이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를, 우리 인생을 변호해주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이 일을 하십니다. 성령님의 이름이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이 단어는 파라(곁에서) 클레토스(말하다)의 합성어입니다. 곁에서 말하는 자, 그래서 변호사, 증언자의 의미입니다. 성령님은 내 인생의 변호사입니다. 이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이 내린 결정을 하나님이 지지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일

예수님의 일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한 일이었기에 예수님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한 일이 곧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34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예수님은 병자의 반응에 상관없이 고통 가운데 있는 생명을 고쳐서 풍성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인간을 얽매던 교리나 전통을 무력화하여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자들에게 삶의 소망과 의미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셨던 큰 일은 말씀의 사역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의 무지와 어둠을 깨우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은 당시 주류였던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당시는 소수였고 팔레스타인의 변방에서 외치던 작은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전 우주를 울립니다. 2천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 마음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의 힘이요, 말로 행한 일의 힘입니다. 행동은 말보다 더 큰소리를 냅니다. 달리 우리는 이것을 진실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진실은 강합니다. 옳은 것,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위력으로 누르고, 별로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외면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살아 남는 것은 거짓이나 위력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일제시대에 치부하며 권력을 누리던 자들은 제대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기억되더라도 치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만주벌판에서, 모든 재산을 빼앗기며 살았던 독립군들의 행적은 기억되고 살아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일이 자신을 증명합니다. 자신의 일이 옳다고 믿으면 그 진실의 힘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행한 일이나 업적이 우리를 증거합니다. 화가는 이론이 아니라 작품으로 승부합니다. 음악가는 그의 노래가 그의 위대함을 증거합니다. 정치가는 자신의 정책과 헌신으로 말을 합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합니다. 검사는 기소로 말합니다. 여기에 사심이 끼고 권력이 작용하면 그 내용이 엉망이 됩니다. 요즘 검찰의 행태를 보면 이들에게 너무 과도한 권력이 주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만간 공수처 설치뿐만 아니라 기소권과 수사권도 분리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일들이 그들을 증거합니다. 언론인은 자기 글로 말을 합니다. 권력 집단이나 사욕에 휘둘린 글이었는지, 진실과 정의에 근거한 글이었는지 평가받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부끄럽지 않게 느낀다면 자신을 증거하는 작품이지만, 스스로도 감추고 싶고 지우고 싶은 글이라면 오히려 그 글이 자신을 고소할 것입니다.

목회자는 설교가 그를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충실히 전하고 위로와 비전을 제시하는 설교였는지, 아니면 무지하고 세상 이념에 치우치고 탐욕적이고 분열적이고 정죄하고 교만에 넘치는 설교였는지 그것이 우리를 증거합니다. 오늘날 인터넷과 방송과 글을 통해서 전해지는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가 우리 수준을 보여줍니다. 설교가 바로 우리입니다.

성경의 증언

예수님을 결정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39절입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33절에서는 요한의 증거가 언급됩니다.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5절입니다.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요한의 증거는 곧 예언자들의 증거의 하나이기에 성경의 증언입니다. 또한 요한의 증거는 오늘날 설교자들의 증거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의 성경과 설교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루터는 성서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이 예수 그리스도는 전 성경을 해석하는 계산점이라 하였습니다. “만일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빼내면 무엇이 남을 것인지 너는 아느냐? 전 성경은 어디서나 오로지 그리스도에 관한 것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창세기에도, 예언서에도, 시편에도, 복음서에도, 서신서에도, 계시록에도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나 흔적을 찾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전제를 말합니다. 성서를 읽는 목적은 한가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 곧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을 얻지 못하면 한낱 문자에 불과합니다.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가 주는 이 생명을 얻고 나면 이제 성서는 사랑의 편지가 됩니다. 역사가 되었건, 허드렛일이 되었건 문자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에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다 들어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사랑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연애편지를 읽는다면 그것은 호기심을 채울 수 있지만 남의 편지일 뿐입니다. 레위기의 지루한 율법들도 요한계시록의 무서운 심판도 영생을 얻은 자의 눈으로 보니 즐겁습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교회교의학』에서 성서의 중심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르트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렀습니다.(『교회교의학Ⅰ/1』, 126-70) 하나님 말씀은 삼중적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계시된 말씀인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 자체입니다. 둘째는 기록된 말씀인 성서가 있는데 성서는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선포했던 내용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셋째는 선포된 말씀인 설교인데, 설교는 성서를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사건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말만 들어도 그 신학의 현란함과 난해함에 치를 떨지만 그 신학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칼 바르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발견한 위대한 신학적 업적은 무엇입니까?” 칼 바르트는 이에 대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성경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정죄하는 형법이 될 것입니다. 지루한 고대 유태인들의 종교사에 불과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절망이요 비극의 출발일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생명과 그 풍성함이 성서를, 세계를, 우리 인생을 빛으로 충만하게 만듭니다.


   요한복음강해 37.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요5: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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