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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11.29.

요한복음강해 35
심판자 예수


요5:19-30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사회적 거리

인류는 코로나 19 펜데믹이라는 재앙을 맞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사람들의 활동이 제한을 당합니다. 우리나라도 3차 유행의 위기입니다. 이때에 가장 많이 강조되는 단어가 사회적 거리두기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되는 기쁜 첫주이지만 우리 교회는 사회적 거리두기 차원에서 온라인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영어로 social distance인데 이는 원래 사회학에서 사용되던 용어입니다. 사회적 계층, 인종, 민족, 성별 등 집단과 집단 간에 느끼는 정서적 문화적 관습적 차이를 일컫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용어가 전염병 감염 위기를 맞아 사람 간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당위적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 간에 거리는 중요합니다. 친한 사람일수록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관계를 4가지 거리로 분류했습니다. 친밀한 거리는 0-46cm로 가족이나 연인들의 거리입니다. 개인적 거리는 46-122cm가 적당한데 이는 친구나 지인과의 거리입니다. 사회생활의 거리는 1.2-3,7m가 적당합니다. 공적인 거리는 3.6-7.7m 이상입니다. 강연이나 공연의 최소한의 거리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거리는 어느 정도입니까?

고슴도치 사랑이란 말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하면 자기 삶도 없어지고, 서로 지나치게 매여 불편해집니다. 고슴도치의 몸에는 가시가 나 있어 너무 가까이 하면 찔립니다. 사랑하되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그 사랑을 더 오래 지속할 수 있습니다. 칼릴 지브란은 사랑의 거리를 요구하며 그의 책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지금은 사람과 사람 간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때입니다.

사회적 거리에 대해서 말하였는데 오늘 성경 말씀을 읽노라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거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거의 ‘0’m에 가깝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19)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셨다”(2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한다”(30)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한다.”(30) 하나님과 예수님은 완벽한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예 하나님의 마음속에 계셨던 분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십니다. 화를 내시는 것 같지만 실은 엄청난 사랑으로 품고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한없이 포용적이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그 속에서는 얼마나 의와 생명에서 벗어난 우주를 보며 괴로워하시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은 마치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과 나누던 은밀한 사랑의 방을 소개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온전한 만남과 사랑과 대화 가운데 계셨기에 두 분 사이에는 거리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을 행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이라는 거대한 율법을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한 마디로 허물어뜨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하나이셨기 때문입니다. 본대로,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행하셨을 뿐입니다.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30)고 말씀하시는 이유도 예수님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없음을 상징하는 언어가 바로 아버지와 아들 메타포입니다. 요한복음에서만 ‘아버지’란 단어가 118번이나 사용됩니다. 다른 세 복음서를 다 합쳐도 66번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아버지와 아들만큼 가까운 거리가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와 딸이 더 가깝다면 그렇게 표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가부장적 문화 상황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사용할 수 있는 최대치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메타포, 곧 은유로 생각하지 않고 실제라고 하는 순간 여러 가지 오해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므로 남성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어머니적 속성도 있고 모든 성을 초월해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들이기에 아버지보다 저열한 위치에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교회사에서 아들의 종속성을 말하던 세력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메타포입니다. 가장 가까운 거리를 표현했을 뿐입니다. 성서 문자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며 자신의 신앙이 대단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거야말로 손가락만 보고 달을 보지 못하는 우매함입니다. 문자가 아니라 영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그 사랑, 그 순종, 그 권위, 그 하나 됨을 보아야 하지 형식적인 언어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신비를 교리적인 언어로 기술한 최고의 신학입니다.

생명을 주는 자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맡기신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입니다.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단한 치유자, 기적술사 정도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분은 육신의 질병 정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주신 분이요 생명을 살리는 분입니다. 우리의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26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1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38년 된 병자는 불행히도 그의 육신의 작은 생명은 치료를 받았지만 영적 생명이라는 온전한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작은 선물에 취해 더 큰 것을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질병이나 고난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통로입니다. 작은 질병을 통해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을 깨닫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행복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질병이나 고난에서 당장 고침을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계기로 더 나아가야 하고 더 나은 것을 얻어야 합니다. 고난이 고난의 극복으로만 끝난다면 좀 억울합니다.

질병이나 고난을 통해서 교훈을 얻는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더 풍성한 생명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당장은 코로나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더 영원한 것과 더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실상을 알게 합니다. 코로나 상황은 인간이 그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 앞에서도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줍니다. 이를 계기로 좀 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거리, 곧 경계를 넘는 것은 위험성을 알아야 합니다. 바이러스는 인간이 다른 종과의 거리를 허물 때 창궐했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지키고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생명의 지속 가능성을 높입니다. 또 거리두기를 통해서 만남의 소중함을, 잠깐 멈춤을 통해서 삶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교훈들이 우리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합니다.

심판자 예수

오늘 말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심판’입니다. 한글성경으로 7번이나 반복됩니다. 사실 심판은 종말의 때에 일어날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랐던 의로운 자들은 위로와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았던 악인들이나 변절자들은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억울함이나 희생이 신원을 받는 날이 심판입니다. 불의에 대해서 응분의 대가가 주어지는 것이 심판입니다. 한 해 농사가 추수로 결판나듯, 우리 인생이나 우주는 심판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그 심판자가 이제는 예수님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22) 아들에 대한 태도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분은 무서운 심판자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양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연약함, 순결함을 연상합니다. 아닙니다. 이 양은 세상 죄라는 엄청난 무게를 지고 가는 힘센 양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그림이 잘 보여줍니다. 어린 양이 공중에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데 그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것이 검이 되어 원수들을 물리칩니다.

예수님은 심판자입니다. 그러나 가혹한 심판자가 아니라 사랑의 심판자이십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한 심판입니다. 심판이 되는 것은 이 선물을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받지 않으니 사망의 상태가 그대로 연장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심판이 이미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5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8절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여기서 듣는 사건은 현재형입니다. 24절에서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서 동사의 시제가 중요합니다. ‘영생을 얻었고’는 과거형처럼 번역이 되었는데 실제는 현재형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사람들이 지금 얻고 있습니다.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완료형입니다. 완료형은 과거에 결정되어 현재에 이른 상태를 말합니다. 심판은 이미 제거되었고 나는 현재 이 사라진 심판의 은혜를 누립니다.

이런 요한복음의 종말론을 가리켜 현재적 종말론, 실현된 종말론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종말이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미래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이미 천국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이 땅을 삽니다. 죄의 짐은 저 천국에서 벗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벗어졌습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장망성을 떠나 천국의 도성을 향해서 가는 ‘크리스천’이라는 순례자가 골고다 십자가 아래를 지나다 자기 등에 달려, 힘들게 했던 죄의 짐이 풀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미 믿음 가운데 있는 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천국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한이 복음서를 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여기 너희가 누구일까요? 믿지 않는 자입니까? 이미 믿음 가운데 있는 자들입니까? 둘 다입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진 영생을 모르면 살고 있는 자들에게 이미 주어졌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이 주어졌지만 천국인지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대 수준이 높아서인가요? 우리 마음이 만족함을 모르기 때문인가요?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이미 영생이고 천국이고 행복입니다. 이미 죄에 고통에서 놓였기에 두려움에서 벗어나 그 자유함을 누리십시오.

불행히도 우리는 결핍을 통해서 이 충만함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코로나로 부자유한 현실이 우리가 누리던 만남의 소중함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천국을 누리기 위해서는 믿음뿐만 아니라 감사가 필요합니다. 감사하면 모든 게 다 천국입니다. 천국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과 같습니다. 모든 상황 조건은 변하지 않았는데 내 마음은 행복이 가득합니다. 열정이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낙관적이고 우리를 축복하는 듯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같은 복들이 주어졌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복들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 자유함을 맛보십시오. 우리는 밭에 보물을 감추고 있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강해 36. 나의 증언자 따로 있으니(요5:31-39)

이종철

   요한복음강해 34. 안식일과 생명(요5:9-18)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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