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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11.22.

요한복음강해 34
안식일과 생명


요5:9-18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평생 동안 침상에 매여 살던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당사자가 자신에게 이 기적을 행한 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12-13) 어떻게 자기 평생의 은인을 모를 수 있습니까? 이 병자는 너무 기뻐서 미처 그 은인에게 관심 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까?

예수님의 태도 또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12) 우리 같으면 동네방네 소문내고 교회 부흥의 계기로 삼으려 했을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병자에게 다시 나타난 이유도 자랑이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 일종의 후속 조치입니다. 다시 병이 재발하거나 또 이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도록 죄를 범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죄와 질병의 문제는 다음에 한 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무엇을 보지 않고 온전히 그 사람만 주목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의사가 병만 보면 됩니다. 병만 상대하고 병만 고쳐야 할 것이 의사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의사가 병을 고친 대가를 생각하고, 병자의 신분이나 재력이나 선인과 악인을 따지고, 적군과 아군을 구분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술이라 할 수 없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의 임무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한 대가를 생각하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나 환경이나 결과에 연연해한다면 그것은 선포의 본질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너무 이상적일지 모르겠지만 의사는 병고치는 것으로만, 목사는 하나님 말씀 전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합니다. 그 본질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욕심이요, 그것 때문에 역설적으로 만족감을 모르고 더 불행해집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육적 질병을 치료하고 그의 영적 생명을 구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질병을 치유할 때 한적한 곳을 고집했습니다. 많은 곳에서 치료하면 영광은 받겠지만 치료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또한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치유나 기적 사건에서 그 대상자들의 이름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고치신 후 바람같이 사라지셨습니다. 병을 고쳤으면 되었지 이름을 알아 무엇하겠습니까? 자랑과 영광과 재물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현대인들의 의식구조에서 보면 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반대로 물질적 욕망이라는 것이 자기 직업의 본질이나 보람을 다 빨아들이는 불행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태도야 그렇다 할지라도 병자의 태도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은인을 알아봤어야 하고, 감사를 표했어야 합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예수를 고발하기까지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15) 이는 9장에서 예수님에 의해 눈을 떴던 소경의 모습과는 대조적입니다. 소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9:31) 소경은 유대인들에게 맞서 예수를 변호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믿기에 이릅니다. 38년 되었던 병자는 육신의 질병을 고침을 받았지만 진리의 길로 나가는 데까지는 실패하였습니다.

기적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동일한 기적이 일어났음에도 이를 계기로 영적 질병을 치유하는 데까지 나간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냥 육신의 질병 치유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다른 생명을 사랑하는 이타적인 헌신의 길로 나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자신의 이기적 삶에 갇혀 삶이 주는 더 풍요로움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헬렌 켈러가 대표적으로 기적의 선순환을 만든 사람입니다. 헬렌 켈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정말 외부와 의사소통할 수 있는 주요 수단들이 모두 단절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만지고 느낄 수만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7세 무렵에 설리반 선생을 만나 글자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은 감격스럽습니다. 목소리의 떨림과 느낌을 통해서 물과 태양과 사랑을 알아갑니다. 그는 이 3중고의 장애를 극복하고 대중 강연을 할 정도로 정상인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맹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앞은 볼 수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이다.” 등 수많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헬렌 켈러는 88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헬렌 켈러의 인생은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끝나고 그 이후의 삶은 어떠했는지 잘 모릅니다. 정상인들이나 사회 주류들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그 틀 안에 가두어 장애를 극복한 한 사람으로서만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헬렌 켈러는 자신의 장애 극복을 통해 이제는 사회적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헬렌 켈러는 1930년대에 사회운동가요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며 불의에 맞서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싸웠습니다. 헬렌 켈러가 가난한 노동자를 지지하여 사회당에 입당하여 파업 현장에 가고 투쟁했던 것은 미국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뉴욕 타임스>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전투적 여성 참정권자입니다. 나는 참정권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내게는 사회주의가 이상을 실현하는 운동입니다.” 그는 열렬한 시각장애인 사회복지 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잔학한 자본가들에게 맞서 싸우는 노동자 투쟁이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이겨내려는 자신의 투쟁과 비슷하다고 느꼈다.”고 전합니다.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기적이나 어떤 사건에서 우리는 그 고통의 극복에만 머물 수도 있고, 더 크고 풍요로운 삶의 지평으로 나가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건강해져서 더 많은 악을 행하는 절망의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이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만큼 왜곡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합니다. 생명을 보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념이나 편견에 사로잡힌 자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인생이 38년 동안 얼마나 힘든 고통의 세월을 살았습니까? 그러면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한 왜곡된 생명이 자유함을 누리는 그 감격보다는 안식일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10) 율법 때문에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이념이나 교리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는 유명합니다. 이들은 안식일에 금하는 39가지나 되는 계명을 두었습니다. 여기에는 안식일에 짐을 들거나 옮겨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 있습니다. 병자는 자기 침상을 들고 갔기에 여기에 걸린 것입니다. 병도 안식일에 치료해서는 안 됩니다. 병 치료는 주로 의사의 일인데 상처가 악화되지 않도록 보호조치만 가능하지 뼈를 맞춘다든지 하는 치료행위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이 조항에 걸린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근본주의적 유대인들은 안식일 율법을 철저히 지킵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안식일에는 누를 수 없습니다. 불을 피우지 말라는 안식일 조항을 확대해석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오후에는 자동적으로 전 층에 엘리베이터가 서도록 만듭니다.

코로나 사태를 맞아서 이 안식일 조항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불피우지 말라는 조항 때문에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온라인 예배나 동영상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현장 대면 예배만 가능하고 이것이 이스라엘 내에 코로나 확산을 시키는 주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국식 방역 모델을 사용하여 철저히 차단을 하였지만 회당 예배를 막지 못해 하루 수천 명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율법이 생명을 위협하는 실정입니다. 우리 한국교회 일부에서도 대면예배를 공동체의 생명보다 앞세우다 무리를 빚기도 했는데 같은 선상에 있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이날 고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38년 병자였는데 하루를 못 참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이 하루라도 고통당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잘못된 적용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과 관련되어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이 한 마디 말씀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복되고 거룩한 날도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안식일의 근본 정신입니다.

율법은 어린아이에게 주는 지침과 같습니다. 예와 아니오, 옳고 그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생 일이라는 것은 복잡하고 겉보기와는 달리 잘잘못을 따져 봐야 할 경우들이 많습니다. 어른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는지 말입니다. 물론 인간은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어 율법으로 강제해야 할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예수님은 여기에 더하여 안식일의 의미를 당신의 권위로 재해석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 구구한 변명이나 해설이 아닙니다. 율법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법문화한 것인데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면 무효화 되는 것입니다.

원래 안식일의 근거는 하나님의 안식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1절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그런데 실제 하나님이 안식일에 쉬실까요? 탈무드에서 랍비 요하난은 하나님이 맡기시지 않는 세 가지 열쇠가 있다고 합니다. 비의 열쇠, 생명의 열쇠, 죽은 자의 부활의 열쇠입니다. 안식일에도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있기에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행동의 동기는 율법이나 인간의 사고나 경험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율법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법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행동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고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하나님은 역사를 창조해 가신다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안식일에 쉬신다는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쉬셨던 이유는 인간이 생명의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안식 없는 노동과 탐욕의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군주제와 불평등 체제하에서 착취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과 행동을 읽고 보았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안식일 때문에 가난한 민중이 힘든 삶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 율법에 도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안식일 조항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를 악용하여 안식일을 우리의 방탕이나 쾌락 추구의 자유로 해석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이루고, 진정한 안식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행동의 동기나 권위의 근거가 하나님 아버지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이 쉬시니 나도 쉰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니 나도 사랑한다. 이제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행동의 근거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자기 인생에 확신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내가 하는 결정들, 내가 하는 한 걸음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것들입니다.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자기 어리석은 생각이나 욕심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하나님을 이용하지는 마십시오. 성경에서 어긋나지 않고 기도하며 심사숙고 가운데 한 결정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그렇게 어긋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예수님의 당당함은 그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동의 이유를 합당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 길은 옳습니다. 이 확신 가운데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강해 35. 심판자 예수(요5:19-30)

이종철

   요한복음강해 33. 베데스다 연못가의 기적(요5:1-9)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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