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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11.15.

요한복음강해 33
베데스다 연못가의 기적


요5:1-9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38년 된 병자

예수님의 세 번째 표적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기적인데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요한은 자신만 알고 있던 표적을 은밀하게 꺼내 들었습니다. 중풍병자인지 앉은뱅이인지 알 수 없으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자기 침상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병자를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그가 병든 지 38년 되었다고 합니다. 질병에 걸린 이 연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것인가요? 아니면 중도에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는 자리에 온종일 누워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 불편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중 하나는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늘 바닥에서 위를 올려보아야 합니다. 그게 사람을 더 주눅 들게 합니다. 답답하게 합니다. 남자들도 가끔 하이힐을 신어보는 경험을 합니다. 불과 몇 센티미터 높아졌을 뿐인데도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호흡하는 공기도 다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후 이 병자는 진짜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두 발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가장 큰 기적입니다. 그에 못지않게 비굴하지 않은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질병은 몸의 불편함도 문제지만 연약함을 통해 우리의 자존심을 꺾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품위를 세워주시는 분입니다. 영적 앉은뱅이라면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이 사람은 이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이름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많은 상징들이 이 병자의 정체를 이스라엘임을 암시합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입니다. 희생양을 바치던 양문 곁입니다.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 곧 자비의 집입니다. 행각은 다섯 개로 모세오경을 연상시킵니다. 더구나 병든 햇수가 38년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방랑하던 햇수가 38년입니다. 신명기 말씀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신2:14) 출애굽 후 시내 산까지는 예정된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기를 거부한 후 하나님의 진노로 광야를 방랑하다 다시 모압 광야를 통해서 가나안에 진입하기까지의 시간이 38년이었습니다. 이 기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과 희망이 없는 무기력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광야시절처럼 이스라엘은 지금 포로된 상태에 있습니다. 죄악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마귀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강대국 로마와 권력자들의 횡포에 포로되어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비주체적 삶을 상징합니다. 우리 민족의 운명 또한 강대국들에 의해서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일제 36년, 그 이후 강대국들에 의한 신식민 75년입니다. 여전히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봅니다.

주님은 포로된 자들을, 포로된 민족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민족 간 경쟁이 세계를 분열과 전쟁으로 몰아갑니다.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비도덕성과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천국은 모든 세상 민족의 정당성에 대한 독약과 같습니다. 민족으로부터 자유로워야 민족이 생존할 수 있고 민족을 통해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천사가 물을 동하여

이 병자에게 유일한 희망은 베데스다 연못이었습니다. 4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중풍병자는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아마 연못물이 휘도는 순간이 있고 이것을 천사가 동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때에 제일 먼저 뛰어드는 사람이 낫는다는 신화입니다. 이 신화를 믿고 낫기를 바라는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서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신화가 사실일까요? 글쎄요? 어떻게 해서 이런 신화가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거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 우연히든 어떤 사정에 의해서 어떤 한 사람이 이 연못을 통해서 나음을 받았던 경험이 있고 그때부터 이런 소문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누가 암이나 불치병에서 어떤 음식을 먹거나 어떤 기도원에서 나았다고 하면 그게 소문으로 확대되어 사람들이 몰려드는 현상과 같습니다. 성서 말씀에서 말하는 기적은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런 신화는 잘 먹힙니다. 성공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일 뿐입니다. 그 환경에서 그 사람에게 잘 맞았기 때문이지 일반적 공식을 만들어내서 모두가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현대인들은 나름의 신화를 가지고 삽니다. 이렇게 살면 행복하다, 이렇게 살면 성공한다... 우리도 우리 수중에 돈이 얼마 있으면, 내가 어느 자리에 오르면, 내가 저 사람을 지지하거나 함께 하면 행복이 주어질 것처럼 착각하지 않습니까? 일전에 말씀드렸던 어른들을 위한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의 한 장면입니다. 이 동화는 한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습니다. 자신이 나비인줄 모르는 애벌레는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믿으며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도중에 애벌레는 하늘로 향해 솟아 있는 큰 기둥을 보게 됩니다. 수많은 애벌레들이 이 기둥 위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줄무늬 애벌레가 다른 애벌레에게 그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건 아무도 몰라, 하지만 모두들 저렇게 달려가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 틀림없이 굉장히 좋은 것이 있을 거야. 안녕. 나도 더 이상 시간이 없어!”

줄무늬 애벌레는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기둥을 오르는 다른 애벌레들의 대열에 합류합니다. 정상을 향해서 올라가야 하는 줄무늬 애벌레에겐 다른 애벌레들은 자기 앞을 가로막는 위험이요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를 밀치며 고생 끝에 정상에 이르지만 그곳에서 절망적인 대화를 듣습니다. “아, 이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구나!” “이 바보야, 조용히 해! 저 밑에서 듣잖아. 저들이 올라오고 싶어 하는 곳에 우리는 와 있는 거야. 여기가 바로 거기야.”

우리 사회는, 현대 사회 또한 이런 신화들로 가득합니다. 과학이, 기술이, 맘몬이, 어떤 영웅의 출현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들어가는 자는

더군다나 이 신화적 세계에도 경쟁과 서열이 있습니다.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4)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중풍병으로 꼼짝 못하는 사람에게는 애시당초 이 게임은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서 이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이 경쟁에 시달립니다. 성적 경쟁, 좋은 대학 진학을 위한 경쟁,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경쟁, 높은 자리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 이웃 가게나 교회와의 경쟁. 그러나 그 경쟁에서 승자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1대 99, 20대 80의 사회 등의 말이 그 치열함을 보여줍니다. 다섯 중 네 명은 루저가 되는 게임입니다. 대다수는 소수을 위한 들러리로 전락합니다. 이 논리에, 이 게임의 룰에 우리는 언제까지 승복해야 합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다른 삶의 방식을 가르쳐주십니다. 모두가 행복한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망을 줄여야 합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끝이 없어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현대의 물질중심의 사회는 만족을 희소한 물질에 두기 때문에 경쟁이 심합니다. 주님은 더 영원한 것, 더 정신적인 것에 진정한 만족이 있다고 합니다. 영적인 진리는 다함이 없습니다. 인간은 동물적 삶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삶 둘 사이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비우고 낮아지지만 하나님만큼 강한 것은 없습니다.

물과 같은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하지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이 최고의 선인 이유는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갑니다. 산이 있으면 멀리 돌아갑니다. 바위가 있으면 피해갑니다. 웅덩이가 있으면 다 채워지기를 기다렸다 갑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바다에 이릅니다. 세상에 바다처럼 크고 위용 있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가장 낮은 곳을 향해 갔는데 가장 위대한 것이 되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38년된 병자에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 아니 주님은 그것을 말이라고 지금 하시는 것입니까? 38년 동안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있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은 체념도 빨리하고 적응도 빠릅니다. 불편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가면 익숙해집니다. 그렇게 익숙해지면 편해지고 적응된 그것을 떠나기 싫어합니다. 나를 보호해주던 침상을 버린다는 것이 아깝고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주님은 불편한 것에 익숙해진 병자, 그 안에 있는 한때 강렬했던 소망의 불을 다시 일깨웁니다. 주님은 능력은 무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주적 결정인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하나에 불을 붙이는 것이 주님의 기적입니다. 병자에게는 다시금 소망이 일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과 평화를 우리는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정말 통일을 원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나라의 허리가 절반이 잘렸습니다. 그렇게 70여 년 넘게 살았습니다. 나름대로 각자의 정치체제나 경제 체제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나름 적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로 합치자고요? 이제는 통일이 불편해졌습니다. 젊은 층에서 통일을 바라지 않는 비율이 높아지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통일이나 평화를 위해 기도하지만 정말 통일을 원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습관적인 것 말고요. 그래야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병자는 연못만 바라보며 헛된 희망에 빠져 있습니다. 연못물이 동하는 신화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가까이에 있습니다. 자기 곁에 서 있는 예수님입니다. 그분에게 요청하고 그분이 말씀하시면 이 병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병자에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 주님이 말씀하시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9)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신 분입니다. 이 분은 이제는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우리는 이분에게 구해야 합니다. 이는 앞에서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애벌레가 취해야 했던 길입니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신화적 세계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 안에 있습니다. 조용히 변태라는 자기 부인의 과정을 거쳐 나비가 되는데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성령의 형태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두의 곁에 계십니다. 그것은 마치 전파와 같습니다. 무수한 전파가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신기가 있어 주파수가 맞을 때 선명한 소리와 영상이 잡히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는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생명입니다. 우리는 영적 중풍병자들입니다. 헛된 희망 속에서 삽니다. 무능력하고 존엄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바로 이런 상황의 역전입니다. 자유를 얻습니다. 능력을 얻습니다. 존엄함을 얻습니다. 사람답게 살게 됩니다. 운명의 노예가 아니라 운명의 주인으로 삽니다. 이 은혜가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강해 34. 안식일과 생명(요5:9-18)

이종철

   요한복음강해 32.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믿으라(요4:46-54)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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