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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11.8.

요한복음강해 32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믿으라


요4:46-54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표적신앙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두 번째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병이 낫거나 귀신을 내쫓는 치유기적은 마태와 마가와 누가복음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적을 통해서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권능이 많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기적에 대한 태도가 매우 다릅니다. 기적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표적’이라 부릅니다. 헬라어로는 ‘세메이온’입니다. 그 원래 의미는 눈에 띄는 표시, 상징, 신호를 뜻합니다. 표적이라 할 때는 기적 자체보다는, 기적을 통해서 다른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기적은 예수님의 신성이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이시기에 기적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할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보며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의 본질을 계시하셨습니다. 물과 같은 무미건조한 인생을, 니고데모와 같은 맛 잃은 유대교를, 사마리아 종교처럼 혼합주의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그런 세력들에게 참된 의미 - 그것을 생명이라 합니다 - 를 가져다주십니다. 이것이 포도주 기적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린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기적 자체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더한 기적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예수님의 기적들 중 엄선하고 엄선해서, 번호를 매겨가며 이 기적을 복음서에 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무엇을 계시하기를 원하시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기적 자체에 매여서 기적이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는 말씀으로 비판하십니다. 기적에만 매몰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러 이유 때문에 요한복음을 읽다 보면 기적을 찬양하는 것인지 비판하는 것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요한복음 12장까지를 표적의 책이라 부릅니다. 마지막에 결론처럼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12:37)라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에 매몰되어 정작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표적을 찾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도 예수님이 표적을 많이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표적을 행하실까 궁금해서 유대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이 찾았던 것은 표적이 아니라 기적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나 기적이란 것은 그때뿐입니다. 시간이 지난 후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을 갈구하듯 더 센 기적을 요구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먹을 것이 하늘에서 마구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기적은 당연한 것이 되고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는 것에 매인 신앙입니다. 우리 삶에 일상화된 것들은 이전에는 기적에 가까운 것들이었습니다. 먹을 것, 병으로부터의 치유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다고 하지 더이상 기적이라 하지 않습니다.

또한 기적신앙은 보이는 것만 신봉합니다. 결과가 보여야 믿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신이 대표적입니다. 미래나 꿈도 보이지 않습니다. 넓게는 사랑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신뢰하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믿고 이것에 우리 전 인생을 걸 수 있겠습니까? 신은 항상 기적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계셨고 팔레스틴 땅에 국한되어 있는데 그 이후의 사람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란 말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신앙을 요구하는 도마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9) 보지 않고 믿는 우리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말씀 신앙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표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도 행하셨기에 죽어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는 것은 그리 큰 일이 아닙니다. 이 기적이 다른 점은 주님이 ‘말씀’으로 살린다는 점입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기적은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처음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고쳐주실 것을 요구했던 왕의 신하도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 말씀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 기적은 초대교회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시공간에 얽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우리 질병은 누가 고쳐줍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문자로 기록된 이 성경이라는 하나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자는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 두 번째 표적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이 말씀은 2천 년 후 예수님을 믿게 될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보고 있고, 또 예수님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남을 믿습니다. 바로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남기셨고, 이제는 말씀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서두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선언을 합니다. 말씀은 기록된 문자이고, 이 문자에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사도 요한보다 더 깊이, 사도 바울보다 더 뜨겁게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타고 성령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믿고 가더니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있는 왕의 신하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가셔서 직접 치유의 기적을 행하셨으면 당장 눈으로 보았기에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은 없고 그분의 말씀만 안고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음이라는 절박한 위기에 있기에 그는 연신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연발하며 갔을 것입니다. 정말 그 말씀대로 우리 아들이 살아날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끌고 왔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신앙인들의 실존입니다. 냉탕 온탕을 오가듯 흔들리지만 별수없다는 심정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집에 다가오자 멀리서 하인들이 뛰어오고 있습니다. “아이가 살아 났습니다.” 그 시각을 물으니 어제 일곱 시부터 열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아들은 그 즉시로 살아났던 것입니다. 이미 아들은 살아났는데 이 사실을 모른 채 온 하루를 불안과 초조함으로 보냈습니다. 처음부터 철저한 믿음을 가졌다면 이 하루의 공포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꾸준히 이런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사실 그 결과가 당장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결과가 죽은 이후에나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평생을 이렇게 흔들리며 살 것입니까?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11:13) 아브라함은 생전에 막벨라 굴이라는 작은 땅만 소유하였지만 이를 통해 장차 올 큰 민족과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며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난을 겪고 핍박을 받을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2)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진다면 당장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신하가 이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일단 예수님이 말씀하셨기에 기적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초대교회 이후 말씀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에게는 다른 경우입니다. 우리는 문자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 문자를 살아 있는 말씀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으면 우리는 기적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모든 기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물었던 것은 “나를 믿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물론 이것이 맹목적인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되지도 않을 기적을 바라며 매달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에 선하게 응답하실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미생물학을 전공했는데 그때 학생운동이 한참이었습니다. 같은 과 친구가 반미구호를 외치며 분신을 했고 죽었습니다. 그 전날 밤 꿈에 보였는데 이 친구가 높은 곳에서 위험스럽게 외치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책임감도 들었고 또 같은 과 친구였기에 그냥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 시신이 안치된 한강병원 장례식 장에서 신앙의 친구 한명과 함께 철야하면서 통성으로 기도했습니다. 전경들도 있고 가족들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안실 안에서 기도했습니다. 친구를 다시 살려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때 붙잡았던 말씀이 요한복음 11장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요11:4)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치 말씀대로 살려주실 것 같은 기분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 믿음이 부족했나요? 제가 광신적인 신앙을 가졌던 탓일까요?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는데 제가 말씀을 강요한 것이었을까요? 극단적이지만 열심을 가진 신앙인들이 자주 빠지는 오류입니다. ‘말씀을 믿는다며!’ ‘예수님은 하실 수 있어!’ 하면서 기적같이 매우 특수한 경우를 사실처럼 믿으라고 강요합니다. 사실 그 이면에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미련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예수님께 강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왕의 신하에게는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우리에게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뜻하신다면 그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지 않으시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소원을 말할 뿐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시겠지요. 다윗의 경우가 좋은 본보기입니다. 다윗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갓난아이가 죽게 되었을 때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신하들이 말도 못 붙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죽자 다윗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툴툴 털고 일어나서 음식을 먹고 아무일 없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말씀대로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시간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뜻은 저 마지막 부활에 맞추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 감안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기도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고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이고 확실한 계시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뢰를 가지고 오늘 하루 우리 인생길을 꿋꿋하게 걸어갑니다. 기쁨과 평화는 이런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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