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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9.13.

요한복음강해 24
그는 흥해야 하겠고


요3:22-30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하늘이 아니면

세례 요한의 증언입니다.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에 대해 다른 성경들보다 다양하게 언급합니다. 세례 요한의 운동은 이스라엘을 넘어 전세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미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현대에도 그 영향은 남아 있는데 이란과 이라크 지역에 만다이교라는 종파가 있습니다. 10만 명도 안 되는 작은 종파인데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영지주의를 2천 년 가까이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시조로 삼은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 종파를 창건했다고도 합니다. 불트만의 요한복음 주석서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지금이야 세례 요한은 당연히 예수님에 앞서서 주의 길을 예비한 자로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공생애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서로 유대교 개혁 운동의 경쟁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 스승에게 예수님의 세례 운동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고 시기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세례의 원조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전 이스라엘의 회개를 선포하며 요단강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세례 운동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이 부분은 요한복음에서는 묘하게 처리합니다만)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이 요단강에서 건너편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마11:11)고 인정했듯이 세례 요한은 진실로 탁월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괘씸하다고 생각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넘어지게 만드는 것은 질투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못지않게 명예에 대한 욕심도 큽니다. 아무리 개혁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일지라도 인기에 대한 욕심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가난해도 사람들의 존경만 먹고도 살 수 있습니다. 아마 수도자나 목회자가 가장 많이 빠지기 쉬운 유혹일 것입니다. 여기서 파생하는 것이 인기에 대한 시기입니다.

어느 사막에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마귀들이 그를 넘어뜨리려고 물질로, 여자로 유혹하고 배고픔과 두려움 등으로 겁을 주었지만 전혀 요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마귀들이 실패했을 때 대장 마귀가 한 수 가르쳐 주겠다고 하더니, 정말 말 한마디로 그 수도사를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대장 마귀는 그 수도사의 귀에 “자네 친구 아무개가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네.” 하고 들려주었습니다. 그 순간 수도사는 “아니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며 그만 시기심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나보다 별로 잘나지 않은 사람이 잘 나가는 것을 보면 시기가 납니다. 시기는 자기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나는 왜 이리 못났을까 하며 절망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개혁운동의 원조요, 나이나 모든 면에서 앞섰는데도 어떻게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위대함은 그가 하는 말들에서 묻어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27절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삶의 태도가 사라졌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래 이제 모든 것은 인간이 결정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이렇게 합리성을 따지니 신이 개입할 공간이 사라졌습니다. 계산하고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거짓도 서슴지 않습니다. 실패하면 자기 탓을 하거나 신을 원망하며 좌절에 빠집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세례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었습니다. 목적은 이스라엘의 회개이고 누구든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특허 개념이나 선도자의 특권의식이 그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뜻하시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현대인들에게는 비난을 받습니다. 무책임하게 들리거나 자신의 게으름이나 무능력을 변호하는 태도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게으름이 아닙니다. 근대인들의 덕목은 성실함이고 이 때문에 무리를 합니다. 무리함은 자연성을 넘는 행동입니다.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공의 대가로 다른 곳이 병이 들고 속이 썩습니다. 입지전에 대한 찬양을 이제는 멈추었으면 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되지 않으면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자연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달리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응할 때 무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정할 때 우리는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거기까지가 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실 일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취하거나 오버하지 않았습니다. 다시금 자신의 일이 무엇이고 자신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그 한계를 분명히 했습니다. 28절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세상의 많은 부작용은 증언자가 주인공이 되려할 때 일어납니다. 그릇이 안 되는데 머리가 되면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습니다. 이단들은 주인이 아닌데 영광의 자리에 오르려다 망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지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여부를 떠나서 그의 주장이 옳고 백성들이 예수에게로 몰립니다. 세례 요한도 끝까지 확신이 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우리가 기다릴 메시야가 당신이냐고 회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단지 시세 영합적이거나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면 오래 가지 않습니다. 시간은 그 사람의 진정성이나 하나님의 뜻하심을 드러나게 하는 도구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져야 우리는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고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친구의 기쁨

세례 요한은 의지적으로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의 감정도 함께 움직였습니다. 마음은 내키지 않는데 도덕적으로, 의무적으로 행해야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세례 요한은 자신을 낮추면서도 만족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 신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신랑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세례 요한은 결혼식 주인공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결합을 기뻐합니다. 실제 결혼식에서 친구들은 축하하고 기뻐하지 않습니까?

이 기쁨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은 잘되고 나는 그 때문에 묻히는 가운데 갖는 기쁨입니다. 자기는 손해 보면서 경쟁적인 친구가 잘 되는 것을 보면서도 만족하는 그런 기쁨입니다. 이럴 수 있었던 비결은 요한이 그 만족을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나 자리나 명예에 관심이 많으면 친구나 사람이 경쟁자가 됩니다. 세상의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대부분은 치열한 경쟁 끝에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의 손해는 상대방의 이익이요, 상대방의 성공은 나의 실패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친구의 성공이 기쁘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가 가장 민감해하는 것이 공정성입니다. 무언가 불공정하다 싶으면 도무지 참지 못합니다.

만족을 하나님께 두었다는 것은 보다 영원하고 고상한 것에서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물질보다는 사랑이나 인간관계에 두는 사람은 친구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편리보다는 가족이나 민족의 화목이나 행복에 더 만족하는 사람은 자신의 손해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신적인 것에 만족을 둘 때 우리는 인간관계의 은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손해에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에서는 잃었으나 영원한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더 고상한 것, 더 신성한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의 기쁨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에 비롯되었습니다. 자녀의 결혼식에서는 부모는 정말 기뻐합니다. 자녀가 잘되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수록 친구가 잘 되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심지어는 원수마저도 사랑하게 됩니다. 원수가 불쌍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이고 온 피조물을 자기 자식처럼 여기는 마음입니다. 각각의 성공이 자녀의 성공처럼 기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더 자유로워집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고

세례 요한의 위대함은 30절의 고백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예전 유머인데 우리나라가 잘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코를 풀 때 “‘흥’ 해!”하고 풀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 덕분에 자식들이 흥하고 나라가 흥했습니다. 우스갯소리지만 말의 중요성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흥하라는 말보다는 깎아내리고 흠집내는 일이 더 많습니다. 언론과 정치권이 이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나라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것 같습니다. 나라는 어떻게 되어도 자기 정파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그만이라는 태도입니다. ‘너는 쇠하고 나는 흥해야 하리라’가 우리의 현재 모습입니다. 이러면 다같이 쇠합니다.

세례 요한은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서 말입니다. 인정이 중요합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낫다는 것, 저 사람이 이 일에서는 탁월하다는 것, 지금 모든 기대는 저 사람에게 모아지고 있다는 것. 이런 인정을 하면 편합니다. 저 사람이 잘 되야 조직이 잘 되고, 가정이 잘되고, 나라가 잘되. 그러면 이 사람을 밀어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인정이 부족합니다. 잘 되는 사람을 더 키우는 힘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합니다. 과거의 우리나라를 대표하던 단어가 ‘너 죽고 나 죽자’였습니다.

유대인의 교훈 중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두 가게가 있었습니다. 물건 값으로 경쟁하거나 손님을 놓고 다투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이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하였습니다. 그 방법은 이랬습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라 다 들어주겠다. 대신 원수와 같은 옆집 사람에게는 그 두 배로 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화해의 방법은 보기 좋게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한쪽 눈을 멀게 해 달라고 구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악함입니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 세례 요한만큼 칭송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교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을 흥하게 하고 자신은 쇠하는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섬기고 낮추는 자가 높아집니다. 상대를 흥하게 하면 자신도 흥합니다. 상대를 쇠하게 하면 자신도 함께 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인간을 흥하게 하기 위해 자신은 십자가의 쇠하는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흥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더 뛰어난 이름을 얻었습니다. 상대를 흥하게 하는 자가 더 큰 자입니다.

김수영의 시 중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는 시가 있습니다. 자기의 작음을 인정할 때 진짜 모래처럼 작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해집니다. 경계심이 사라집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자유로워집니다.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래처럼 작아지셨기에, 정말 모래알 같은 우리가 태산처럼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강해 25.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요3:31-36)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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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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