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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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9.6

요한복음강해 23
빛과 어둠의 싸움


요3:17-21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면 죄인이나 이방인들을 향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두려운 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뒤집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지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를 심판하려는 부모는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낳았다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을 좇아가며 아담과 하나님까지 이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에는 부모를 모르는 고아도 있지만 단지 모를 뿐이지 자기를 낳은 존재는 분명 있습니다. 자녀 중에는 효자도 있고 불효자도 있습니다.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불효자라고 해서 자녀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믿지 않고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에서 그들이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어찌되었던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한다고 설교합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 판단한다는 것은 인간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섣부른 판단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1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인간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본인이 결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받지 않은 것이 심판입니다. 물에 빠져서 구명튜브를 던져 주었는데 본인이 받지 않아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심판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니느웨를 심판하기를 원했던 요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4:11) 하나님은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그 가축들까지도 아끼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악이란 문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악을 만드신 분이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빛과 어둠의 관계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빛이 본질이고 그림자는 빛을 외면할 때 생깁니다. 하나님이 그림자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에서 멀어질 때 그림자가 생기고 어둠이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악에 대해서 규정하기를 선의 결핍이라 하였습니다. 악마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이 없는 곳에 생기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즉각적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심판에 있지 않습니다. 18절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여기서 동사의 시제에 주목하십시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미래시제가 아니라 현재시제입니다. 미래에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가 아니고 바로 지금 심판에서 면제 됩니다.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할 때 이는 현재완료입니다. 과거에 이미 심판을 받아서 현재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아니 나는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믿음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확신입니다. 지금 믿을 것에 대한 시급성입니다. 초점은 심판에 있지 않습니다. 이 엄청난 선물을 왜 받지 않는냐는 절박함입니다.

믿는 자는

결국은 인간의 선택입니다. 칼빈주의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를 지옥에 보내는 것은 염라대왕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를 천당에 보내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밥상은 하나님이 차려주시지만 먹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 그를 믿는 자입니다. 15절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절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8절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믿고 안 믿고는 자신이 결정합니다.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기 위해 예정론을 말합니다. 인간의 의나 노력이 전혀 끼어들지 않도록 선행은총이니, 오직 믿음이니 하는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 인간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결정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 배후에는 어떤 기묘한 하나님의 은혜나 은총이 있을지라도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의 입술로 결정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8-9) 저는 여기서 오직 믿음이나 칭의의 교리를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내 자신이 결정한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은 여러분의 입술 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결정합니다. 물론 불가항력적인 것은 있습니다. 어떤 우연한 사고나 최선을 다했지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을 원망합니다. 그런 원망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많은 부분 이 또한 인간이 결정한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 사회라는 것은 공동체입니다. 나는 죄를 저지르거나 악을 행하지 않았지만 타인의 죄나 실수 때문에 함께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또한 의로운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 인간의 책임으로 남습니다.

위기나 불안을 야기시키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 아닙니까? 전세계가 코로나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제레미 리프킨은 기후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인간이 만든 기후변화로 생태계는 그 서식지를 잃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은 야생동물들을 인간 쪽으로 내몹니다. 이 야생생물들이 가진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킵니다. 페스트, 천연두, 매독 등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치명적 질병들은 인간이 동물들을 가축화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의 탐욕이 이런 질병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세상은 인간을 위해서 주어졌고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무조건 진보나 개발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공존이나 느림이 더 생명친화적입니다. 그런 가능성들이 주어졌고 인간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는 휘발류로만 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전기로 가는 차가 이제 미래형 자동차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근 1세기 넘게 휘발류 자동차의 문명을 이끌어온 것은 누구입니까? 처음 자동차가 개발되었을 때는 전기 자동차가 휘발류 차보다 많았답니다. 석유업자들이, 가솔린 연료 개발 자동차 회사들이, 싸거나 편리하다는 이유로 그렇게 우리 문명을 이끌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무지와 폭력이 이처럼 공기질을 나쁘게 하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많게 했습니다. 인간의 선택입니다.

인간의 불행의 많은 부분은 인간 스스로 자초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우리의 어떤 원망도 들으시는 친정어머니와 같은 분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분에게 책임을 떠넘기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많은 문제들은 기도보다는 우리의 행동을 돌이키는 것이 더 빠른 응답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공동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삶이 당한 불운의 이유를 찾는 빠른 길일 수 있습니다.

빛과 어둠

악은 없고, 악은 본질이 아니라 하였지만 그것이 쌓이다보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악이 실체가 되고 그림자가 모여 거대한 어둠을 이룹니다. 20절과 21절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탐욕이 주는 쾌락이 있습니다. 내가 좀 더 욕심을 내면, 내가 좀 악을 행하면 타인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빛의 행위는 나눔입니다. 사랑입니다. 함께 함입니다. 그 원리가 다르기에 피하고 미워하기조차 합니다.

인간 사회의 대부분의 악은 공동체성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무인도에 혼자 산다면 무슨 짓을 해도 악은 없습니다. 함께 모여 살다보니 악이 생기는데 그 근본은 공공성과 이기심의 충돌입니다. 이웃의 집을 탐냅니다. 부동산 문제나 의사들의 집단 파업도 이 연장선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타적 삶이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말씀합니다. 이기적인 것은 본능적이지만 결국 자기 생명을 해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악은 어둠 속에서 행해집니다.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우리 행복이나 생명에 반하는 일을 할 때 부끄러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반성하게 하고 멈추게 합니다.

악이 빛으로 나와 공공연하게 행해진다면 그것은 정말 위험합니다. 이념이나 종교의 죄가 무서운 것이 이것입니다. 양심이 마비됩니다. 나름 합리화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아주 싫어하셨던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소위 눈떴다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9:39) 무지도 악입니다.

가끔 보면 교수나 의사나 목사나 무슨 원로라며 사회를 향해 훈계를 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일지 모르나 그것 때문에 저절로 그들의 인성이 훌륭해지거나 사회를 보는 시각이 탁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수양을 쌓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까지 그들은 농부나 일반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이란 것이 자신의 눈을 얼마나 왜곡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영광스럽게도 목사도 함께 같다 붙였는데 목사들은 사회성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자기 전문 분야의 실력도 형편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종교인을 향하여 사회의 지도자라고 하였는데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눈만 떴지 소경들입니다.

선이 본질이라고 하여 저절로 선이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투쟁이 있어야 합니다. 우주에는 빛의 공간보다 어둠의 공간이 더 많습니다. 빛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빛과 어둠의 투쟁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쿰란 종파라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수도생활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빛이라 여겼습니다. “진리의 원천은 빛의 샘물이고, 거짓의 원천은 어두움의 샘물입니다. 모든 의의 자녀들에 대한 지배는 빛의 임금의 장중에 있고, 그들은 빛의 길로 행합니다. 거짓의 자녀들에 대한 모든 지배는 어두움의 천사의 장중에 있고, 그들은 어두움의 길로 행합니다.” 빛과 어둠의 싸움입니다. 신비한 영적 전투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영적 전투가 아닙니다. 보이는 생활 투쟁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구체적인 싸움의 모습을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육체의 일은 무엇입니까?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빛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밝아집니다. 우리 운명의 어두운 부분이 줄어듭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빛으로 가득하기에 어둠이 나 그늘진 곳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빛이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보았고 만졌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의 길을 가고 행함으로 세상을 비추고 우리 또한 밞음 가운데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강해 24. 그는 흥해야 하겠고(요3:22-30)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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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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