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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8.30.

요한복음강해 2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3:13-17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신앙인들이 가장 많이 듣고 암송하고 또 복음을 전할 때 사용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그가 신앙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증거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을 위해 내어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를 맞으며 사랑이냐 예배냐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가 대면예배를 고집하면서 무엇이 진정한 예배인지의 논쟁도 함께 벌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란 염병으로 인해 세상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주요 감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웃을 위해서 예배를 포기하는 것이 옳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은 예배가 아니고 이웃사랑입니다.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예배보다 형제 화목이 먼저입니다. 예배보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dlerjt이 구약 예언자들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배를 못 드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비대면 예배나 온라인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영이신 하나님은 장소나 공간이나 시간에 매이지 않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의 임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타고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을 타고 영이 임재할 때 그것이 예배입니다. 온라인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배입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나, 장소나 형식이 어떠한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현장예배가 강조되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 말씀의 효과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공동체의 생명을 위해서, 이웃 사랑을 위해서 자제해야 될 때입니다.

요즘처럼 한국 기독교가 낳설어 보인 적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교회를 다닌다면 한 형제자매요 동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한 배를 탄 존재인지 갈수록 회의가 듭니다. 언어나 태도나 코드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고 같은 천국을 그리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한국교회 적지 않은 다수의 퇴행적이며 이념적인 기독교 행태를 보십시오. 그들이 보이는 반사회성, 미신성, 배타성, 차별과 혐오, 거짓과 현혹(가짜뉴스가 횡행하고 또 그 거짓을 악용하는 행태), 물질성, 권력숭배, 이념성, 폭력성... 우리는 정말 예수를 믿는 같은 신앙인들 맞습니까? 이제 그들의 얼굴에서 온유함과 평화가 사라졌습니다. 살벌한 독기와 광기를 풍기고, 역겨울 정도로 탐욕이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교리나 신앙이 있기 전에 먼저 이 사랑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만의 사랑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것도, 우리의 적대자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 십자가 사랑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들과 신정론에 대한 열쇠입니다. 나에게서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나를 어둠 속에 방치하고 전혀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을 때 우리는 신의 존재를 의심합니다. 그 순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이 바로 이 십자가 사랑입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무언가 다른 뜻이 있겠지! 나를 나쁜 길로, 구렁텅이에 방치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분이 할 짓은 아니지, 무언가 다른 사정이 있겠지! 십자가의 사랑이 운명의 우연성과 폭력을 이기는 힘입니다.

역사가 약육강식의 짐승의 법칙처럼 흘러가는 것같이 보일 때, 힘없는 자들이 짓밟히고 불의한 자들이 아무 일 없이 잘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이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을 정도로 악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과 싸우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결국 모든 것을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으실 것입니다. 신양은 바로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십자가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모세가 뱀을 든 것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 십자가에 대해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 말씀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출애굽 한 후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하면서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을 터뜨렸고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이들을 심판하셨습니다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매우 폭력적인 하나님의 이 모습은 십자가 이후에는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살려달라고 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놋뱀을 본 자는 다 살아났습니다. 마치 고대의 동형 주술과 같았습니다. 이열치열의 논리처럼 뱀으로 뱀을 잡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장대에 달린 놋뱀이 아닙니다. 놋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뜻을 오해하여 이스라엘은 이후에 놋뱀을 우상처럼 이용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종교개혁 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18:4)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놋뱀에 현혹되었던 것입니다. 신구약 중간기에 기록된 지혜서라는 외경에서는 이를 다시 해석합니다. “회심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는데 그들이 본 짐승(놋뱀)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신 주님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지혜서 16:6-7)

십자가 형상도 자칫 이런 미신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마치 십자가 형상만 달고 있으면 악한 것이 물러갈 것처럼 착각하는데 이런 태도를 주술적이라 합니다. 최근에 퇴마 관련 드라마에서 십자가가 마치 악을 물리치는 도구처럼 사용되는데 미신적이고, 현대 악마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14절 말씀의 초점은 놋뱀이 아니라, 놋뱀이 높이 들린 것처럼 예수님도 들려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들린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사건을 말합니다. 헬라어 ‘휲소오’의 아람어 원 단어를 찾아가면 ‘높이 오르다’와 ‘십자가에 달리다’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들림을 받는다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들림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 아버지께로 가는 영광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십자가는 죽음의 비참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오르는 영광의 길이요 승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승리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에게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기록하는 골고다의 십자가에는 비통함이나 비극이 없습니다. 영광스럽고 예수님은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요19:30)는 승리의 선언으로 최후를 마치십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린 것은 수치나 비극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늘나라로 가는 첩경이요 대로입니다.

영생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영생,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란 말이 드뭅니다. 하나님나라는 니고데모와 관련된 3장에서만 언급됩니다. ‘영생’이라는 말이 이를 대신합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인데 바울도 하나님나라란 말 대신에 구원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역사적 사회적 지평을 갖는데 반해서 영생은 개인 실존적 지평을 갖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생이라는 말이 더 친숙합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담론보다는 내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생명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은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을 다른 식으로 말씀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일단 육체적 생명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신 사람이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릅니다. 누구를 사랑하거나 사랑을 받으면 깊은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거기서 나오는 기쁨과 설레임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 전과 그 이후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이라고 할 때 두 가지 방식으로 쓰입니다. 먼저는 정말 죽지 않은 생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피상적이고 정신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체 육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것이 종말 때에 다시 사는 부활의 생명이고, 죽음을 넘어선 천국에서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은 또한 현재 주어집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면 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현재형)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완료형)”(요5:24) 영생을 얻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은 완료형으로서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나는 이미 심판에서 벗어났습니다. 현재 주어지는 영생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가 육체적으로 죽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죽음을 삼킵니다. 생명의 힘은 너무 강력해서 죽음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잠든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능력 있는 신앙인은 바로 살면서 이 영생의 기쁨과 능력을 소유하며 살아갑니다.

미래라는 것은 현재에 영향을 미칩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과 기대가 강력하면 현재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미래라는 것은 앞에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만질 수도,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실은 현재를 살고 있는 나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미래입니다. 나는 왕위가 예정되어 있는 왕자요 공주입니다. 나는 상속이 약속되어 있지만 지금은 낮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상속자입니다. 미래가 전혀 영향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미래가 현재를 주장합니다. 나는 영생을 현재 누립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담대합니다. 두려움이나 불안이 없습니다. 양보합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지혜롭습니다. 긍정적입니다. 비굴하지 않습니다. 위엄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길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빛이 있습니다. 모든 부요함과 충만함이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이 은혜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되시길 기도합니다.


   요한복음강해 23. 빛과 어둠의 싸움(요3:17-21)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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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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