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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8.23.

요한복음강해 21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요3:5-12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거듭나라

예전에는 “거듭나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흔히 했습니다. 답하기 곤란해 했는데 이 거듭남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거듭나다’(3), ‘물과 성령으로 나다’(5), ‘영으로 나다’(6), ‘성령으로 난 사람’(8) 등 반복되며 거듭남의 정체가 점점 구체화 됩니다. ‘겐나오’라는 헬라어 뜻은 ‘태어나다’인데 오늘 말씀에서 매 구절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출생 사건에 비유합니다. 거듭나라는 것은 어머니의 모태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거듭’을 뜻하는 헬라오 ‘아노텐’은 일차적으로 ‘위로부터’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늘로부터 태어나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늘로부터 납니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경험적인 측면에서 그랬는데 도무지 성령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의식은 뚜렷한데, 어디 귀신들린 것처럼 성령이라는 이타적 존재가 감각되지 않는데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나는 성령이 안 느껴지는데 그러면 거듭나지 않은 것입니까? 이에 대해서 시원하게 답변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알 수 있다고 하거나, 성령은 바람 같아서 인식할 수 없다는 정도였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에서 이 거듭남의 비밀을 명쾌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뭐뭐 –이다’보다는 ‘뭐뭐가 -아니다’로 접근하는 것이 쉽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렇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6) 이 말은 성령의 길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육이라고 규정한 인간적이거나 기존의 종교나 사상이 제시했던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요즘이야 바람의 원리를 알고 기상예보가 발달해서 그렇지만 이전 사람들은 바람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도 예측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 이번에는 땅의 일과 하늘의 일로 대조합니다. 땅의 논리로는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이 뜻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생각하고 인간이 노력하는 그 길에는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요14:6)는 매우 교만한 듯하고, 이후 기독교 배타성의 근원이 되는 이 말을 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것으로서는 어떤 희망도 어떤 구원의 길도 없다는 선언입니다.

모든 종교가 이렇게 저렇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모든 이념과 사상이 이런 방향으로 가면 사회가 나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 말씀은 그것은 “다 거짓말이다.”라 선언합니다. 제 아무리 노력해도 육이요, 땅의 일이요, 땅의 논리입니다. 하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령은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절망입니다. 니고데모의 머릿속에서는 도무지 답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인간은 늪에 빠졌습니다. 허우적댈수록 오히려 깊이 빠져듭니다. 오직 밖으로부터 던져진 밧줄만이 우리를 이 늪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도 해당됩니다. 나는 구원의 비밀을 알고 있기에, 나는 예수를 믿고 있기에 이 허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기독교도 어느새 니고데모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구원을 교리화하는 순간 그렇습니다. 사영리, 곧 네 가지 영적 진리 식으로 도식화하는 순간 그것은 어느새 인간의 논리가 되고 맙니다. 너무 빨리 안심합니다. 성령을 언급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우리 구원을 돕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먼저는 심판입니다. 파멸입니다.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비되는 하늘의 실체로서 ‘아니오’의 선언입니다. 그것은 거짓이고, 그림자고, 망상이다 외칩니다. 이 절망의 소리를 들어야 우리는 진정한 구원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철저한 혁명입니다. 인간적 기초 위에 쌓아올린 것은 100% 부패합니다. 거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완전히 개벽되어야 합니다. 동양적 시각으로 요한복음 강해를 하는 데 탁월했던 이현주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의 책에서 거듭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존재하는 ‘방법’과 몸담아 사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살아있게 한 생명줄(탯줄)을 끊고 새로운 줄에 목숨을 매다는 것이다.”

존재 자체의 완전한 탈바꿈 이게 거듭남이고 성령으로 난 사람입니다. 완전히 개벽하지 않고 이전 것이 살아 있으면 이것이 반드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인간적인 탐욕, 이기심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어느 때는 정치적 이념이나 민족주의 같은 것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옵니다. 이것들이 조용히 또아리를 틀고 잠복했다가 꿈틀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주인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의 위기요 실패의 모습입니다. 한국 근대화기의 선교사 헐버트의 『대한제국멸망사』의 분석에서 “한국인은 사회적으로는 유교적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적이며, 밑바닥에는 샤마니즘이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이 샤마니즘이 불교를 내세종교로, 유교를 제사종교로 만들더니 이제 한국기독교를 기복신앙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전광훈 류의 반사회성, 미신성, 배타성, 이념성, 폭력성입니다. 거듭남은 매일의 사건이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모든 인간적인 것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과 결별해야 소망이 있습니다.

또한 이는 겉으로 보기에 선한 자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칼 바르트가 말했듯이 혁명적인 인간들이 더 위험합니다. 헛된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소위 성인이라는 존재가 더 위험합니다. 인간적 가능성을 여전히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혁명적 거인주의가 위험합니다.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는 것같은 착각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났다는 것은 모든 인간적 가능성을 끊었다는 뜻입니다.

이 거듭남의 신비를 오해하게 만드는 세력 중 하나가 구원파 류의 이단들입니다. 그들은 한 번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니기에 죄의 고백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기도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 구원교리는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하나님도 건들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적인 안전판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은 오늘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의 볼모가 아니라 심판하는 방망이입니다. 안전장치가 아니라 파멸선언입니다.

어떤 교파는 거듭남의 체험을 중시합니다. 언제 거듭났는지 때와 장소를 기억해야 한다고 합니다. 요한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에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듯이 그런 뚜렷한 경험을 요구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듯이 방언이나 어떤 성령체험이 있어야 온전히 거듭났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 구원을 확신시키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런 체험조차도 인간적인 것들입니다. 그런 검증도구와도 철저히 단절해야 합니다. 체험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인간은 불가능하다는 절망체험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눈물이 더 중요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물과 성령으로”입니다. 물은 세례를 가리킵니다. 세례는 곧 신앙을 말합니다. 우리가 영과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믿을 때 부어지는 것이 성령입니다. 믿음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행위입니다. 다행히 하늘에서 손을 내미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할 때 그 신앙을 받으시는 분이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중요한데 그것은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없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바람으로 표현됩니다. 구약에서 성령을 루아흐라고 하였습니다. 바람이란 뜻입니다. 바람은 능력입니다. 창조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바람입니다. 어둠과 혼돈의 물을 쫓아내는 것도 바람입니다. 바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신의 손입니다. 바람은 또한 생명입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인간의 호흡은 하나님의 숨입니다. 하나님이 이 숨을 거두어가면 죽습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 중에서 마른 뼈의 환상이 있습니다. 마른 뼈만 가득한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에스겔이 대언하자 죽은 뼈들이 일어나 서로 맞추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그 마른 뼈를 향하야 이렇게 외칩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겔37:9) 온전한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보는 인간관입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부를 때 헬라인들이 그렇듯 프쉬케라 부르지 않습니다. 프쉬케는 영혼입니다. 육체와는 다른 실존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인들이나 바울은 인간을 프뉴마, 곧 영이라 부릅니다. 인간의 영은 이래서 성령하고 같은 단어를 쓰기에 좀 혼란스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할 때 인간은 산 영입니다. 죽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영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을 말합니다. 물리적 숨이나 귀신 같은 어떤 능력의 덮침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바람의 현상으로 말씀합니다. 8절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거듭난 지 모를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숨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루아흐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알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난 사람도 바람의 흔적처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바람에 의해서 나뭇잎이 흔들릴 때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변화는 중요합니다. 우리 삶의 열매는 중요합니다. 직접증거는 아니지만 훌륭한 간접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수행을 하였지만 도무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가 그의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수행을 그만두어야 하겠오, 도무리 나아진 것이 없으니” 그러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니예요 당신은 많이 달라졌어요. 화를 내는 횟수도 무척 작아졌구요.” 노력하다 보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괄목상대라는 말도 있습니다. 선비는 3일만에 만나도 그 눈을 비비고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안에 어떤 학문적 깨달음을 얻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성령이 우리 안에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성령의 열매라는 말도 가능합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는데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데 어떻게 거룩함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책망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성령은 있다가도 사라지기도 합니다. 안심하지 마십시오. 성령은 바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에 뜻에 순종하면 우리는 아름답고 능력 있는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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