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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8.16.

요한복음강해 20
니고데모의 실패


요3:1-5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밤은 집에서 쉬는 시간이고 활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때 예수님을 방문했다는 것은 밤이라는 시간 자체가 갖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의 심리 상태는 어둡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빛이 없습니다. 니고데모의 실패입니다. 그의 실패는 단순하게 볼 수 없는데 니고데모는 소위 유대교의 엘리트이기 때문입니다. 3장 곳곳에서는 니고데모가 유대교 지도자임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이다. 당시 바리새인이라 하면 평신도 운동집단으로 예수님 시대에 대략 8천 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는 개혁세력입니다. 니고데모는 또한 유대인의 지도자라 불립니다. 아마 산헤드린 의회 의원일 것입니다. 오늘날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신분입니다. 어느 정도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이스라엘 선생이라 합니다. 사상가요 문제 앞에서 답을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무능력에 빠졌습니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나 그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말하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니고데모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연구하였습니다. 절기마다 성전을 방문하고 성전을 찾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즐겨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나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도 모르고, 확신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니고데모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무엇보다 세상성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들을 많이 행하시는 것을 보니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고, 그가 무슨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미 2장 23절 이하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기적이 일어나고 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표적신앙의 저변에는 이 세상에 대한 긍정과 이 세상의 힘과 논리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노골적으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이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고전1:22-24)고 선언합니다.

신앙은 육체의 질병보다는 우리 마음과 영혼의 질병을 문제 삼습니다. 물질의 축복보다는 하늘나라의 복으로 부요할 것을 말씀합니다. 군림하고 파워를 행사하는 것보다 무력해지고 십자가에 희생할 것을 요구합니다. 먹을 것으로 배부른 것보다 영혼의 양식으로 풍요해질 것을 요구합니다. 배부른 돼지가 아니라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길이 행복하다는 것이 신앙의 진리입니다. 세상성에 곧 물질성에 빠져 있는 현대인들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은 말로 비꼽니다. “돈 5달러를 잃었을 때는 심각해지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를 잃은 것에 대해서는 심각해하지 않는다.”

이 세상성에 빠져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종교에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예수 믿으면 부자됩니까? 예수 믿으면 건강해집니까? 어느 정도 그런 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정말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려면 좋은 회사에 취직하거나 좋은 라이선스를 갖는 것이 더 현명합니다. 좋은 의사를 만나고 병원을 잘 활용하면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영혼의 평화를 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삶의 참된 의미와 올바른 삶의 길을 가르치는 곳이 교회입니다. 영원한 세계에 대한 약속으로 우리가 좀더 선하고 나은 삶을 살도록 이끄는 곳입니다.

표적 신앙에 매인 자들은 결국 예수를 죽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능력이 항상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그 효용성이 떨어지면 다른 것으로 바꾸어버리고 맙니다. 그 적나라한 모습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종교 재판이 잔인하게 자행되던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 광장에 돌연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늙은 종교 심문관은 그가 진짜 그리스도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를 감옥에 가두고 화형시키려 합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거부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대중들은 빵을 원하는데 예수는 돌로 떡덩이를 만드는 것을 거부하고 대중들에게 먹기 힘든 천상의 빵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은 “우리들을 노예로 삼되 우리들에게 빵을 주시는 편이 낫습니다.”고 외칩니다. 빵을 외면한 예수는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현대판 니고데모가 되었습니다. 노골적으로 기복신앙을 찬양합니다. 미신과 어리석음으로 성도들을 현혹합니다. 교회의 크기와 건물을 자랑합니다. 권력과 힘을 추구하고 가난한 자를 무시합니다. 반공주의와 정치 이념에 빠져 광화문으로 나가고 설교 단상을 온갖 가짜뉴스로 어지럽힙니다. 거짓의 아비를 닮아서 거짓을 일삼고 권력욕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성에 빠져있습니다. 관심이 여기에 있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멉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 수도 없습니다.

거듭나라

니고데모는 세상성에 빠졌기에 예수님의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니고데모를 향하여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자 니고데모가 다음과 같이 반문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3)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습니다. 서로 관심사가 다르고 언어가 뜻하는 바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설마 예수님이 늙은 니고데모에게 모태에 다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나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노텐’입니다. 아노텐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거듭’ ‘다시’라는 뜻도 있지만, ‘위로부터’ 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나는 거듭남을 말씀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영적인 거듭남입니다.

세상성에 빠져 물질적인 세계에 갇힌 니고데모에게는 다시 태어나라는 말에 사람의 육체적 탄생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는 물질의 논리에 갇혀 영적인 세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지난번에 말씀드린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와 같은 형편입니다. 바깥세계에 나가 참 빛을 보고온 자와 여전히 사슬에 묶여 그림자만 보고 있는 자 사이에 발생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붕괴입니다.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림자 세계의 언어와 논리로 이해하려 하니 도무지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동굴 우화에서는 그림자 세계에 묶여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며 진리를 말하는 자를 죽이려 합니다. “그는 위쪽으로 올라가더니 눈이 상해서 돌아왔군.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지. 쇠사슬을 풀어주며 위쪽으로 데려가려는 자는 잡아 죽일 수만 있다면 모조리 죽여야 해.”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신앙의 언어는 논리적이 아니라 믿음의 언어입니다. 하나님, 그리스도, 부활, 영생, 하나님의 나라 다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들이 아닙니다. 그저 ‘믿습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과 신앙의 길은 다릅니다. 철학은 보이는 세계의 문제를 다루고 그것을 근본이론으로 추론합니다. 반면에 신앙은 눈으로 검증할 수 없는 존재와 의미,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다룹니다. 그래서 한편 생각하면 허무맹랑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기에 신앙의 언어는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믿으라는 말로 귀착이 됩니다.

이것이 답답했던지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내기 논증으로 신앙의 우월성을 증명하려 하였습니다. 사후의 세계가 없다면 “0”이고, 있다면 “전부”를 얻는 내기입니다. 없다는 데 내기를 건 사람은 실제 내세가 있다면 이 사람은 없다고 하였기에 전부를 잃게 될 것이고, 정말 없다면 설사 맞혔다 할지라도 내세가 없기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점수는 어떤 경우에도 “0”입니다. 반대로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데 내기를 건 사람은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실제 사후 세계가 있다면 이 사람은 “전부”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없다고 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없으면 그것으로 끝이니까요. 무엇이 더 현명할까요?

이런 식으로 논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나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것은 누구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실 왜 사랑하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지도 논리적 결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믿음의 논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믿는 자의 삶입니다. 믿으니 불안이 사라졌습니까? 믿으니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고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향한 연민이 있습니까? 자기 삶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있습니까? 물질적인 욕심이 사라지고 채우는 것보다는 비움의 가치가 더 커졌습니까? 감사가 있고 낙심하지 않습니까? 용기를 얻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까? 그러면 진정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주님은 거듭남을 설명하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근본적 의미는 다음 시간에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은 다만 이 말씀이 현상적으로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인지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적당한 개혁이나 개선이 아니라 뿌리째 바꾸는 개벽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돌배나무를 정성껏 길렀습니다. 영양분도 잔뜩 주고 잡초나 병충해도 제거하였습니다. 그 결과 풍성한 수확을 얻었는데 100배의 돌배를 얻었습니다. 이게 개혁의 결과입니다.

바리새파는 유대교의 개혁을 꿈꾸었습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새롭게 적용하고 이것을 온 이스라엘이 실천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소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적 개혁으로는 좀더 나은 인간이 나올 뿐입니다. 그 인간도 시간이 가면 다른 나쁜 인간으로 굳어집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라는 말씀은 철저한 개벽입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완전히 탈바꿈하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여러 번 위기라는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사태는 정말 한국교회를 향한 심각한 경고입니다. 미약하게나마 그동안 교회의 정체성을 붙잡았던 성장과 선교라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에 대해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단이라 하지만 신천지로부터 전광훈 씨의 이념적 집단까지 교회가 가진 배타성, 미신성, 폐쇄성, 물질성, 권력성, 이념성이 온상이 되어 코로나가 확대됩니다.

이런 위기에 대한 한국교회의 반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다는 것이 외부의 적을 만들어놓고 이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반공이념이 그랬고, 때로는 민족주의가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이슬람 반대와 동성애 혐오로 나갑니다. 지금은 차별금지법 반대가 한국교회 정체성을 지키는 보루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맘몬과 권력과 쾌락을 좇는 근본적인 교회의 악들을 교묘히 피해갑니다. 한국교회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동성애자의 일탈입니까 아니면 목회자나 교회의 성적 타락입니까? 교회가 세상성에 빠져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말은 교회를 향한 근본적 개혁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단순히 더 나은 존재가 된 게 아닙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들입니다. 개벽 사건입니다. 보이지 않기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 영혼이 의식할 뿐입니다. 느끼고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형편은 자신이 다시 태어난 존재인가 확인해야 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매일 확인하고 의식하고 그 의미를 묵상하며 자기 것으로 만들 때 진정 우리는 하나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은혜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되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강해 21.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요3:5-12)

이종철

   요한복음강해 19. 참것과 그림자(요2:18-25)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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