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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8.9.

요한복음강해 19
참것과 그림자


요2:18-25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성전이란 무엇인가?

‘성전이란 무엇인가?’ 이런 식의 질문은 사람을 질리게 합니다. 교회는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결혼이란 무엇인가? 분노란 무엇인가? 도 그런 범주에 들어갑니다. 설명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답을 찾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문제되는 것에 대한 직답을 원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이나 철학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기에 이런 식의 질문에 익숙해야 합니다. 성전은 왜 생겼고, 그 의미와 목표가 무엇인지 항상 질문을 받아야 성전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다양한 욕망과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새 보면 성전을 변질시켜버립니다.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지요.

성전은 달리 하나님의 집이라 불렸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신 분이기에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공간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특정 시공간에 얽혀 있어야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공간이면서 또한 하나님이 계실 수 없는 곳입니다. 이 한계를 알아야 성전이 제기능을 합니다. 솔로몬은 성전 낙성식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열왕기상 8장 27절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크신 하나님을 좁은 공간이 가두어둘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전은 무용한가?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29)

하나님은 성전에 자신의 이름을 두심으로써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솔로몬의 기도입니다.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30)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에 성전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에 온갖 인간의 욕망은 잠잠해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2:20)

예루살렘이 위대한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후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지었습니다. 이것을 스룹바벨 성전 또는 제2성전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초라했습니다. 예수시대에 이방 이두매 출신으로 유대인의 왕이 된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 스룹바벨 성전을 중건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BC 20년부터 시작하여 AD 63년경에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80년 넘게 지었습니다. 얼마나 화려했던지 헤롯 성전을 보지 않은 자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그 성전의 위용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전의 외부형태를 보는 자는 그 눈과 영혼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성전은 어느 곳이든 거대한 금판으로 덮여 있었고. 해가 뜨면 금판에서 불같은 광선이 반사되어 그것을 똑바로 보려 해도 해를 직시할 수 없는 것 같이 눈을 돌려야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성전은 예수님의 예언처럼 완공된 지 7년 후인 AD 70년에 그야말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로마군에 의해서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때 살아남았던 성전 벽의 일부가 바로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입니다.

예수님 공생애 기간에도 성전은 공사중이었습니다. 46년 동안 짓고 있다는 말을 합니다. 성전은 거룩한 공간이기 때문에 엄격히 구역이 통제되었습니다. 유대 여인들은 나오스라 불리는 성소 공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바깥의 여인의 뜰까지만 접근 가능합니다. 제사장들은 성소 안에서는 앉아 있어서도 안 되고 맨발로 다녀야 합니다. 이 때문에 겨울에는 동상에 자주 걸렸습니다. 이방인들은 성전 접근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는데 성전 광장의 중간에 경계석을 세웠고 이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죽임을 면치 못합니다.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에 이 성전이 있습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이 성전 쪽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절기를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는 것이 삶의 기쁨이요 삶의 의미였습니다. 시편 84편은 성전에 대한 사랑을 잘 표현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시84:1-2) 심지어 성전에 둥지를 튼 참새나 제비가 부럽기조차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시84:3) 세상의 어떤 화려한 곳보다 불편한 장소인 성전이 더 좋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 실제 예루살렘 성전 주변에는 묘가 많습니다. 나이 들고 혼자가 된 사람들은 성전에 와서 여생을 마치려 합니다.

진짜 성전

이런 엄청난 무게를 가진 성전 앞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 주님은 성전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시키려 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이 성전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그런 하나님과의 만남은 사라지고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어리석음과 인간의 전통과 인간의 온갖 이데올로기로 얽힌 곳이 되었습니다. 헛된 것들은 무너져야 합니다. 인간적인 것들이 무너져야 참된 것이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흘만에 새로운 성전을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어떤 성전입니까?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 사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 삼일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몸소 성전입니다. 성전은 건물이고 예수님은 인격인데 서로 비교가 되지 않지 않습니까? 물질적으로는 그렇지만 성전의 원래 목적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말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온전히 계시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을 모시며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성전입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그 순간은 하나님의 쉐키나가 임하여 지성소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몸소 성전이시고 성전의 목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8)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의 형태로 교회와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곧 가정 교회이기 때문에 수십 명 정도 모인 작은 공동체, 비린내 나고 가죽냄새 나는 바로 그곳이 성전이라 하였습니다. 이교도들이 신전이란 표현하는 그곳, 온갖 위용과 화려함으로 가득한 그곳이 신전이 아니라, 미련하고 지혜나 문벌 좋은 자가 없는 그곳,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작은 공동체인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신전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크든 작든 교회는 존귀합니다. 부하든 천하든, 내 인생이 성공적이든 실패작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위대합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입니다. 베를 짜는 하나님이란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36년 동안 장기수배를 받으며 동학의 기초를 닦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자신의 신도의 집에서 피신해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집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는 모습을 보며 최시형이 그 신도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베를 짜고 있는가?”
“예 제 며느리입니다.”
“아닐세, 바로 하나님이네”
이 소리를 듣자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그 자리에서 절을 하였다고 합니다.

동학의 교리에서 나온 일화이지만 기독교 또한 인간을 향한 경외는 그에 버금갑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모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실제와 그림자

히브리서에서는 같은 내용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이 진리를 전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히8:5) 모세가 지었던 지상 성전은 실은 하늘에 있는 진짜를 흉내 낸 모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자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히9:24) 참 것과 그림자를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 참 것입니다. 땅의 성전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참 것을 드러내신 분이고 예수가 참것입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은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먹어도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림자는 소유해도 남지 않는 허망한 것입니다. 그림자는 자기가 아닙니다. 진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림자는 죽지도 않습니다. 진정한 고통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요즘 철학이나 심리학에서도 주목하는 현상입니다. 정신분석학자 라깡이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없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 이 게 무슨 말입니까? 나라는 것은 세상이 규정한 나이고, 과거의 나일 뿐이지 현재의 나란 실재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세상의 소리에 끌려가는 것이 우리입니다. 기껏 의식이 풀리는 꿈속에서나 가끔씩 제 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참것을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는 늘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진짜 예수가 거기 있고 거기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아픈데 어디가, 왜 아픈지를 모릅니다.

우리가 소유하려 노력하는 재물은 땅따먹기 놀이와 같습니다. 납작한 작은 돌을 훔치며 열심히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자기 소유의 땅을 넓힙니다. 그렇게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아무개야 와서 밥 먹으라”는 소리에 모든 것을 놓고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림자입니다. 우리를 배부르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떡에 취한 무리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6-27) 그림자에 속한 것은 썩을 양식입니다. 참된 것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지나치게 세상 것에 연연하고 매여 있는 것이 현대인들입니다. 가끔은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그림자가 아닌지, 내것이 아닌 것은 아닌지 하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진정 소중한 것에 자신을 투자할 수 있습니다. 달리는 자기 손에 있는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그 소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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