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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 설교 2020.8.2.

요한복음강해 18
성전 정화 사건


요2:12-17
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예루살렘 성전체제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하시자마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올라가셨다는 정도로는 약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진하셨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다릅니다. 공관복음서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활동하셨고 그 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만 읽으면 예수님은 마치 1년 동안 공생애를 보낸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 설이 나온 것은 전적으로 요한복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맞아 오늘 말씀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세 번에 걸쳐 유월절이 언급됩니다. 13절 말씀이 그 처음이고 두번째는 6장 2절입니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은 11장 55절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예루살렘을 이처럼 자주 방문하신 이유는 예루살렘이 세상 권력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항상 올라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높은 권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처음부터 예루살렘을 향해 돌진하셨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심장부를 쳐서 유대 종교의 실패를 만천하에 폭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치를 내쫓는 정화작업을 하시는데 이는 마치 예수님이 홀로 유대교와 전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교는 맛 잃은 물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붓듯이 유대교는 해체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유월절 즈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희생당한 어린양과 같은 운명을 수행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여 생긴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의 민족해방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절을 맞아 메시아 신앙의 기대는 높아집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포로상태에 있고 지금의 권력자는 로마제국입니다. 그러나 유대교가 제공하는 희망은 헛됩니다. 참된 해방은 지금 유대교의 길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빛을 영접할 때 거기에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예수님이 새로운 정치운동을 제안하신 것은 아닙니다. 성전정화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열심당 운동의 일종으로 보았을지 모릅니다. 그들의 눈은 현실적이며 정치적 해방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인가? 그러나 예수님이 목표로 한 것은 일시적 해방이 아니라 영구한 해방입니다. 정치체제야 시시각각 변합니다. 한 체제를 무너뜨리면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지만 어느새 그것도 또다른 억압세력이 됩니다. 인간이 가진 어리석음과 욕심이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혁명을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실제적입니다. 그것이 자기 책임적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외부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변화이고 그러할 때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천국은 나 혼자 결정해야 할 것이지 누가 대신 책임질 수 없습니다.

인간사의 혁명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혁명은 정치적 혁명과 의식의 혁명 양자가 함께 갈 때 완전합니다. 정치적 혁명만 꾀한다면 단지 어제의 왕비가 오늘 시녀가 되고 어제의 시녀가 오늘 왕비가 되는 그런 교체일 뿐입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있었지만 얼마 못가 왕정 복고가 있고 이어서 나폴레옹이 등장했습니다. 다시 혁명과 복고가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결국 1871년 제5차 혁명인 파리꼼뮌까지 이어졌습니다. 자기 변화 곧, 의식의 혁명으로 가지 않고 권력만 바꾸는 운동을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집값이나 전세값 폭등 등 부동산 문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대부분 언론이나 사람들은 현 정부가 부동산 대책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문제의 주범은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욕망 아닙니까? 내 집값이 오르길 바라고 손쉽게 재산을 불리려는 욕심이 부동산에 투사되고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현명한 정책이 제정된다고 하여 부동산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닙니다. 자신 안에 있는 욕심을 죽여야 합니다. 자기 집 한 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는 공동체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진정한 혁명입니다.

통일이나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정부 당국자들이 만나서 적당히 협상하면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양보하고 세금 더 내고 좀 불편하게 살 각오가 없으면 통일은 어렵습니다. 우리 안에 수많은 탈북자들이 있는데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면서 이루는 통일은 또다른 차별과 분리를 낳을 뿐입니다. 코로나 사태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자기 반성과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백신이나 치료제가 개발되면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은 영구한 혁명이고 자기 변화입니다. 유대교 체제에 헛된 희망을 두고 교묘히 자기 문제를 회피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 희망의 싹을 잘라버리셨습니다.

장사치의 소굴

성전정화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폭력적입니다. 성전 안에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곳은 성소가 아니라 성전 내부의 이방인의 뜰 근처였을 것입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는 제사용입니다.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은 제사용 짐승을 가지고 오기 힘드니 이곳에서 구입을 하였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은 성전세나 성전에 바칠 헌금을 바꾸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상숭배를 엄격히 금하여 황제나 우상의 초상이 새겨진 데나리온 화폐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드라크마나 세겔로 바꾸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예배를 위한 나름 선한 방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곧 주객이 전도되고 맙니다. 필요를 위해서 불가피하게 허용했던 것이 이제는 주인이 됩니다. 장사치들은 이곳에서 큰 이익을 얻으려 하고, 제사장들은 자릿세나 세금을 통한 수익에 혈안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있다는 말이 이에 해당합니다. 우리의 실정도 그러한데 예배를 위해서 교회 건물이 필요한데 나중에는 건물이 교회의 목표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영혼 구원의 결과가 성장인데, 어느새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은 사라지고 성장이 목표가 되어버립니다.

우리 영혼이 성전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성 테레사 수녀는 우리 영혼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혼의 궁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까? 소나 양의 소리입니까? 재물에 대한 염려와 이루지 못한 욕망의 한숨입니까? 찬양 대신 불평과 원망입니까? 사랑의 말 대신 비방과 분노의 말입니까? 이 소리가 들릴 때마다 주님은 채찍으로 내 쫓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주님은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되자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폭력을 행사하시는데 그 모습이 상세히 묘사됩니다. 주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채찍을 휘둘러 양이나 소를 다 내쫓으셨습니다. 돈 바구니를 쏟아서 바닥에 쏟으셨습니다. 동전이 구르는 소리가 들립니까? 상을 다 엎으셨습니다. 요란한 소리를 내고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매우 격한 분노의 발산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열심당적 행위로 봅니다. 기원전 164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로 인해 더럽혀졌던 성전을 다시 깨끗이 씻는 수전절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전절은 요한복음에서만 언급됩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10:22) 만약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면 가장 결정적 이유가 바로 이 성전 정화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폭력적 행동의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가장 거룩하고 순결한 곳이 되어야 하는데 이들을 이곳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도무지 그 분노를 주님은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화를 꾹 참거나 온순한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17절의 ‘열심’이라는 헬라어는 ‘젤로스’인데 여기서 ‘열심당’이라는 명칭이 나왔습니다. 멀리는 민수기의 비느하스의 열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 하나와 미디안 여인이 바알 우상을 섬긴 후 그 의식 중 하나고 섹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 비느하스가 이 모습을 보고 의분이 나서 창으로 두 남녀를 한꺼번에 찔러죽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심판을 그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민25:11) 여기 ‘질투’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젤로오’입니다.

의인의 분노는 바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분노입니다. 하나님이 화나시는데 누가 대신 화를 내주면 하나님의 화가 조금은 풀립니다. 세상의 악이나 세상의 허무를 향하여 가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 그들에 의하여 정의는 굳건해 집니다. 사회가 변화하고 진보합니다. 몇 년 전 주목 받았던 책으로 프랑스의 스테판 에셀이 쓴 《분노하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94세의 에셀이란 노인이 쓴 34 페이지 분량의 작은 책인데 프랑스에서 출간된지 7 개월만에 200만 부를 돌파했었습니다. 지은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였는데 그 때의 경험을 기초로 요즘 세대를 향하여 분노할 것을 명령합니다. 레지스탕스란 말 자체가 ‘저항한다’는 의미인데 그 저항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습니다. 에셀은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에 분노하라고 말합니다.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벌어진 적은 없었다고 하며 그런 사회에 대해서 분노하라고 말합니다. 돈을 쫓아 질주하는 경쟁 사회를 향하여 분노하라고 말합니다.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理想)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 정치계, 경제계, 지성계의 책임자들과 사회 구성원 전체는 맡은 바 사명을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되며, 우리 사회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국제 금융시장의 독재에 휘둘려서도 안 된다”

에셀은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고 하며 이 무관심이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폭력투쟁으로 나서라는 의도는 아닙니다. 에셀은 합법적이며 평화적인 봉기를 제시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부당하다고 느낄 때 한숨만 쉬지 말고 의견을 표출하고 참여하고 조직화할 때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어갑니다. 분노는 정당합니다. 예수님의 폭력은 기득권 세력은 폭력의 틀로 덧씌우려 하겠지만 폭력도 아닙니다.

제가 분노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면서 조심스런 면이 있습니다. 열심당도 그렇고 현대의 근본주의자들, 극단적으로는 탈레반이 자신들의 분노와 폭력성을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분노의 근원에 ‘주님’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의 동기가 이념이나 교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생명입니다. 주님의 정의는 욕망이나 이해를 벗어나 순수한 정의입니다. 민족의 이해도 아닙니다. 어떤 집단이나 정권의 이해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사랑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사람을 차마 죽일 수 없어 자신을 죽이신 사랑입니다. 불의에 대해서 잠잠하지 않으시되 주님은 사랑의 행동으로 그 분노를 표출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불의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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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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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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