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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7.26.

요한복음강해 17
물로 포도주를 만들다


요2:1-11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기적과 표적

예수님의 대외적인 첫 번째 활동입니다. 가나라는 곳에서 벌어진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예수님이 행하신 첫번째 표적이라 말씀합니다. 표적이라 하였습니다. 표적은 헬라어로 ‘세메이온’이라 하는데 기적과 다릅니다. 기적은 기적 자체가 중요합니다. 인간의 경탄을 자아내는 초월적 행위로 주로 마술사나 예언자들이 행합니다. 그러나 표적은 다릅니다. 표적은 기적을 통해서 주는 메시지가 더 중요합니다. 표적은 기적이라는 도구를 이용합니다. 기적은 합리성과 타성에 박혔던 인간의 눈을 놀라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인간은 뒤통수를 쳐야 집중하고 반성합니다.

그런 점에서 표적은 기적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고, 그 상징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진리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기적의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기적을 보지 않고도 그 ‘의미’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이미 말씀의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아야 믿겠다는 도마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기적 신앙에만 매몰되고 기적만 찾는 것은 반쪽 신앙입니다. 이것이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여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사흘째 되던 날 일어났습니다. 사흘째라고 하니 아마 예수님이 빌립과 나다나엘을 만났던 그 날이었을 것입니다. 이 만남은 요단강 근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일행은 아마 북쪽으로 올라가 갈릴리로 가고,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을 거쳐 그 인근에 있는 가나라는 곳에 갔던 것 같습니다. 나다나엘이 가나 사람(21:2)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결혼하는 가정이 나다나엘의 친척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신부가 신랑 집에 와서 결혼식을 치릅니다. 결혼식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입니다. 흥겨운 잔치에 그만 포도주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큰일입니다. 축제의 흥이 사라지게 생겼습니다.

그러자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여기 예수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당연히 마리아라 생각할 것인데 요한복음 전체에서는 예수의 어머니로 마리아란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요한을 마리아의 아들로 입양하는 듯한 그 유명한 장면에서도 마리아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장면을 제가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란 이름도,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2장 4절에서도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고 반문합니다. 이 ‘여자여(귀나이)’라는 호칭 때문에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중동지방에서는 존칭어로 사용되었다든지,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차별을 두는 호칭이라든지 논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보다는 요한이 마리아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여자’라고 부르는데 더 주목을 합니다. 요한의 기록으로 추정되는 요한계시록에서도 ‘여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뜻하는 아이를 낳는 자가 여자로 불립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계12:1, 5) 이 여자는 또한 사탄으로 상징되는 용에게서 박해를 받아 광야로 피신합니다.(계12:13-14) 이를 종합해 보면 여자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위기에서 예수님께 간청하는 자는 바로 마리아로 상징되는 교회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가족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신비의 관계로 교회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는 여자의 말은 교회를 향한 말입니다. 이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하인들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머니의 말에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고 말씀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다는 뜻일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때가 있고 그 때에 맞추어 행동하는데 지금은 내가 기적을 행하여 영광을 보일 때가 아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보면 결국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간구가 그때를 앞당긴 것입니다. 우리는 때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때와 계획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압니까? 하나님만 아시지 인간에게는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마구 던지는 것뿐입니다. 이리저리 행동하고 쑤시고 하다 보면 하나님의 때와 계획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행동하는 자가 볼 것이고 알게 될 것입니다. 행하는 자는 경솔한 자가 아니라 진정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물의 종교 포도주의 종교

마침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습니다.”(6) 정결예식이라 함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을 말합니다. 두세 통이면 대략 한 항아리 당 18-24갤론 정도입니다. 여섯 개면 대략 120갤론 정도입니다. 1갤론이 3.8L이니 대략 500L입니다. 750ml가 포도주 한 병이니 대략 660병이 나옵니다. 엄청난 양입니다. 이 양이 너무 많아서 돌 항아리 물 전체가 아니라 그중에서 떠다 준 물만 포도주로 변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돌 항아리에 가득 찬 물마다 포도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하셨고 하인들은 “아귀까지 채웠습니다.”(7) 이들은 그대로 순종했고 그래서 그 많은 포도주를 얻었습니다. 적당히 채웠다면 적은 양의 포도주를 얻었을 것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행하시지만 기적의 크기는 인간의 순종이 결정합니다. 이 모습은 구약의 엘리사가 재산이라고는 기름 한 병밖에 남지 않은 가난한 여인에게 내렸던 명령과 같습니다.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왕하 4:3-4) 엘리사의 말대로 여인은 방 안을 많은 그릇으로 채웠습니다. 그리고는 기름을 부으니 방안의 모든 그릇이 기름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여인이 그릇을 조금만 빌렸다면 작은 기적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인들은 아귀까지 가득 채웠고 그 모든 물이 포도주로 변하였습니다. 순종하되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순종한 만큼 기적을 볼 것입니다.

이 돌 항아리와 그 안에 담긴 물은 유대교를 상징합니다. 정결용이라는 말과 6이라는 숫자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완전수인 일곱보다 하나가 모자란 인간의 수입니다. 유대교는 종교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물과 같이 무미건조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파장난 잔치와 같습니다. 종교가 주는 구원의 힘과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죽은 종교입니다. 이 모습은 2장 후반부에 보여주는 성전의 실패에서 잘 드러납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유대교의 무기력은 3장의 니고데모에서도 나타납니다. 니고데모는 유대교의 선생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알지도 못하며 확신도 없습니다. 4장은 혼합종교인 사마리아 종교의 실패를 보여줍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정오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우물가로 나온 권태로운 인생입니다. 종교가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력이나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된 기독교는 잔치의 종교입니다. 살아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연회장은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10)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품질과 맛이 오죽했겠습니까? 잔치의 기쁨이 살아나고 사람들은 흥이 넘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 공생애 동안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비난하자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막2:19)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은 마치 혼인잔치와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령으로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영원한 잔치입니다.

타종교를 비하하는 것 같아 미안한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사집 같고, 기독교는 잔치집 같다. 일방적이지만 일면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입니다. 신앙인들은 장례식장에서도 노래하며 찬송합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 정서는 기쁨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가 바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즉각 주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쁨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우리의 표정은 지옥에서 출장나온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머금은 자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설교학의 대가 루돌프 보렌은 ‘설교의 제1목표는 기쁨이다’고 하였습니다. 설교는 놀이입니다. 놀이는 정열을 다하게 만드는 흥이 있습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잔치에서 흥이 난 듯 떠들썩한 것이 예배여야 합니다.

성만찬은 구원의 축제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빵이 되어 분위기가 무겁게 되었습니다. 중세의 성만찬은 마치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를 재현하는 것과 같은 의식이었습니다. 아닙니다. 그 이전에 성만찬은 장차 하늘나라에서 나눌 메시야 잔치의 재연입니다. 사람들은 먹을 때 기분이 좋고 행복합니다. 한 식구는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로 먹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포도주를 물로 만드는 사람들

그런데 기독교가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더 위대한 능력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 포도주를 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교회가 평화와 사랑의 안식처가 아니라 전투장이 되었습니다. 온갖 차별과 저주의 말이 들립니다. 세상 이념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경쟁과 분열이 있습니다. 적진에 돌격 직전의 선동이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보다는 율법과 죽음의 말이 가득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보루 이전에, 교회는 최전선의 돌격부대 이전에 잔치집입니다. 화약 연기 품기는 곳이 아니라 맛있는 포도주의 향내 가득한 곳입니다. 기쁨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이적을 가나 혼인잔치에서 행하셨습니다. 물로 다름 아닌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물과 같은 우리 인생을 맛나게, 풍미있게 만드시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재미없는 인생이 어떤 환경에서든 감사요, 찬송이요, 기쁨이 넘칩니다. 청교도들의 검은 옷은 우리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밝고 환한 옷이 우리의 옷입니다. 한숨과 후회가 아니라 성령의 바람이 우리의 호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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