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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7.19.

요한복음강해 16
하늘이 열리고


요1:47-51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나다나엘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인 사람이 나사렛 사람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예수가 자신을 알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향하여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47)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짜 이스라엘인도 있고 진짜 이스라엘인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행하는 사람,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을 소망하며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진짜 이스라엘인입니다.

반면에 말로만 이스라엘, 이스라엘 하고 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민족을 위한 희생은 전혀 없고 좋은 자리 차지하며 이익만 취하거나 자기 명예만 높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와 이해에 사로잡혀 이스라엘을 향한 언약과 비전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참 이스라엘인이 아닙니다. 한국인도 참 한국인이 있고 가짜 한국인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친필 글씨를 쓴 후 낙관이나 사인을 대신하여 약지가 잘린 손바닥 인장을 찍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대한국인 안중근’이라 씁니다. 한국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한국민족의 자주와 해방을 위해 희생하였기에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돌아가신 백 모씨라는 분이 있습니다. 일제 때는 간도 특설대 장교로, 해방 후는 육군 대장까지 오르고, 각종 요직에 있으면서 2천억 대의 재산가로, 100세 가까이 장수하다가 이제는 육군 현충원에 안장된 일로 인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냥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산 사람에게 ‘대한국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어렵습니다.

진짜로 이스라엘을 사랑하던 사람에게 이런 참 이스라엘이라 부른다면 정말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관심사를 타인이 알아줄 때 사람은 진정으로 자신이 인정받는다는 느낌을 같습니다. 나다나엘은 매우 민족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하는 신앙고백도 ‘이스라엘 왕’이라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던 지도자의 출현했다는 감격의 고백입니다. 예수님도 나다나엘에게는 인자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야곱의 이적을 들면 장차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질 놀라운 민족적 축복을 보여줍니다. 민족 비전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주요한 관심사를 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은밀한 곳까지고 보고 이해하셨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실제 지나가다 우연히 보았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나다나엘이 이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는 나다나엘에게 자신만의 은밀한 장소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이 은밀히 기도하던 곳,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던 곳, 아니면 자신의 아픔이나 어떤 추억이 있던 곳입니다. 이곳에 오면 위로를 받고 자신을 정리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곳입니다.

우리에게는 나만의 무화과나무가 필요합니다. 엘리야에게는 로뎀나무가 있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과의 싸움에 지친 엘리야가 쓰러져 먹고 자고 했던 곳. 엘리야는 이곳에서 위로를 받았고 다시 힘을 내어 이스라엘의 개혁을 위해 일어섰습니다. 이것은 장소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시간이 될 수도 있고, 특정 행동이나, 은밀하게 즐기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 영혼의 지성소와 같은 곳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은밀한 기도의 장소나 묵상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전에 언급했던 『단테 신곡 강의』란 책을 썼던 이마미치 도모노부가 좋은 예입니다. 이 사람은 단테의 『신곡』을 너무 좋아해서 매주 토요일 밤, 세 시간을 『신곡』 연구에만 쏟았습니다. 그렇게 50년을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노트들이 쌓였습니다. 이 시간에 대해 이 분은  “이 비밀스러운 학문적 습관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비밀스런 의식을 치르듯 그렇게 50년을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70세가 넘은 나이에 『신곡』을 강의하게 되었고 이것을 책으로 엮어 『단테 신곡 강의』를 저술하였습니다. 누구에게든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이것이 우리 영혼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의 가장 은밀한 곳에 침입했습니다. 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녹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가장 은밀한 곳에서 함께 하며 참된 위로와 힘을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

진리를 깨닫는 데 꼭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찰나에도 우리는 깊은 만남에 이를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그렇습니다. 하룻밤을 함께 하며 예수님을 알아간 이들이 있습니다. 요한이나 안드레나 베드로나 빌립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또는 오랜 동안 지켜보며 예수님을 만난 이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렇고 예수님의 가족이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만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한 가지는 그 만남 후 그들의 신앙고백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고백은 다양합니다. 나다나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라 고백합니다. 참 이스라엘인답게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고백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여러 증언을 하였지만 그의 대표적인 고백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하였습니다(29, 36). 세례 요한은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예수의 무거운 어깨를 보았던 것입니다. 시몬의 형제 안드레는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1)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대부분의 소망이었습니다. 빌립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분”(45)이라 고백합니다. 자신이 읽던 성경 속에 약속되었던 분이 출현했다는 고백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렸고 자신이 외면했던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4:29)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에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고 고백합니다. 예수님 허리의 창자국에 검지 손가락을 푹 집어넣어 확인하고 있는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1602) 그림은 유명합니다. 현실주의자인 도마의 고백입니다.

각자는 자기 나름의 처지나 방식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은 각양 각색의 색깔을 가진 모두에게 맞습니다. 자기만의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자기 삶의 중심에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변두리가 아니라 한복판에서 주님이 되시길 원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나의 마음으로 나의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나다나엘은 자신의 은밀한 곳을 알아본 예수님에게 놀랐지만, 예수님은 이보다 더 큰 일도 보게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51) 이 말씀의 의미는 바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이 말씀의 배경이 창세기 28장의 야곱과 관련된 말씀인 것은 분명합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눈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다가 벧엘이란 곳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창28:12)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 난해합니다. 무언가 매우 신성한 곳이라는 의미는 알겠는데 그 모습이 좀 기묘합니다. 이럴 경우 유대인들은 악가다란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악가다는 이야기식 풀이이고 이것이 우리들이 흔히 접하는 탈무드의 교훈이나 유머들입니다. 유대인의 성경 주석집인 미드라쉬에서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지상의 야곱과 그 원형이 되는 천상의 야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천상의 야곱이 얼마나 소중한지 하나님이 천사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천사 하나가 땅에 내려갔다가 벧엘의 돌베개 위에 잠든 지상의 야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흥분한 천사가 하늘에 있는 동료들에게도 이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자 동료 천사들이 야곱의 얼굴을 보기 위해 줄지어서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이는 야곱, 곧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존재의 존귀함을 보여줍니다. 현실에는 고단하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유명한 존재들입니다. 디아스포라가 되어 고향을 잃고 이곳저곳을 떠도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 곧 유태인의 삶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천사도 흠모하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지 이스라엘의 영광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상이 받을 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야곱의 사다리 대신 인자의 사다리를 말씀합니다.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이것은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과 땅이 소통하는 모습입니다. 천사가 하늘의 비밀한 것들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상에 내려옵니다. 이 땅의 영혼이나 기도들을 가지고 또 하늘의 천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로 올라갑니다. 막혔던 하늘의 통로가 열렸습니다. 이는 그 앞에 있는 “하늘이 열리고”란 말씀이 이를 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동안 하늘은 닫혔고 구름이 가득해서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민감하게 깨달은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영지주의를 대표하는 그림 중에 하나는 별들과 태양이 박혀 있는 반원형의 현실세계가 있고 어떤 영지주의자가 그 세계를 찢고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계에 머리를 내밀고 보는 그림입니다. 영원한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잘 보여줍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의미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바로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은 여전히 현실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그것을 깨우치려는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고 말씀하는데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모태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며 반문합니다. 예수님이 거듭나라가 하신 말씀은 ‘아노텐’인데 이는 거듭이라는 뜻도 있지만 ‘위로부터’라는 뜻도 있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라는 뜻이며 이는 성령으로 나라는 뜻입니다. 각성과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하늘 나라의 사람입니다.

도마는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 합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늘이 열렸는데 도마는 여전히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전히 육신의 한계성에 매여 주님이 보여주신 진리의 일부만 보고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나가는 자는 진리와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저하거나 땅에 매여 있으면 우리는 희미하게 볼 뿐입니다. 요한의 답답함이 여기 있습니다. 여기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이 생명의 풍성함으로 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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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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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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