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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7.12.

요한복음강해 15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요1:43-46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빌립을 만났습니다. 그후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모세와 선지자가 기록한 메시아라 전합니다. 이 말을 듣는 나다나엘의 반응은 매우 냉소적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사렛과 같은 시시한 동네에서 무슨 메시야가 날 수 있겠어’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편견 또는 선입관이라 합니다. 그대로의 사실을 보지 못하고 과거의 가치관이나 시각으로 사람이나 어떤 사건을 평가합니다.

사실 나사렛이란 동네는 그런 선입관이 생길 만했습니다. 나사렛이 속한 갈릴리는 원래는 북왕국의 영토였습니다. 그렇지만 앗수르에게 망한 후 오랜 세월 이방인들이 거하는 혼합지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기원전 100년경에 유다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의 갈릴리’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주하였지만 정통 유대 땅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했습니다. 토지는 주로 예루살렘이나 타 지역에 거하는 부재지주들이 소유했습니다. 예수님의 불의한 농부와 아들 비유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막12:1) 사회경제적인 갈등이 심해 이곳에서는 농민 반란이나 열심당 운동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유다’의 폭동이 대표적입니다. 이방의 땅, 착취의 땅, 반란의 땅이었습니다. 나사렛은 이런 갈릴리의 한복판에 있었기에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빌립이나 나다나엘은 다 갈릴리 출신입니다. 빌립은 갈릴리 북쪽 벳새다 사람이고,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입니다(요21:2). 이 말은 매우 자조적인데 “우리는 안 돼!”라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예전에 우리 민족을 비하하여 ‘냄비근성’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지속적이질 못하고 쉽게 끓고 빨리 식는다는 부정적 의미입니다. ‘빨리빨리’가 우리 민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비가 와도 뛰지 않았습니다. ‘동창이 밝았는데 소치는 아이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점잖은 충고도 필요했습니다. 세종 때는 농민들의 토지세 개혁을 하는데 13년이나 걸렸습니다. 저항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국민투표도 하고 가장 좋은 방향을 찾다가 그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국주의의 침략과 근대화 과정에서 삶의 척박함 때문에 부지런함으로 바뀌었습니다. 환경에 적응하다 보면 사람도, 민족도 바뀝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전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완고해지고 발전이 없습니다. 지금 메시야가 갈릴리 나사렛에 오셨고, 갈릴리가 세계의 중심이 되고 있는데 편견에 잡혀 그 빛을 보지 못합니다.

진리를 발견하는데, 생명을 얻는데 가장 큰 적은 이 편견입니다. 이를 달리 집착 또는 아집이라 합니다. 인간이 가지기 쉬운 편견은 베이컨이라는 철학자가 잘 정리하였습니다. 베이컨은 인간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폐단을 네 가지 우상으로 정의하였습니다. 첫째는 종족의 우상입니다. 한 종족 전체가 가지는 폐단입니다. 공통된 경험에서 감정과 욕망이 생기고 이것이 자연을 왜곡되게 봅니다. 인간이라는 종족, 아니면 민족이라는 종족이 갖게 되는 왜곡된 시각입니다. 버섯을 먹는 버섯과 독버섯으로 구분하는데 듣는 독버섯은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인간의 먹거리 기준이지 자신은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인데요. 한민족이기 때문에, 동양인이기 때문에, 인간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편견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입니다. 평생을 동굴에서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밝은 세상에 나왔을 때 보이는 판단이나 편견을 말합니다. 이는 각 개인이 가지는 폐단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갖는 편견입니다. 자기 보는 눈이 다인 줄 압니다.

셋째는 시장의 우상입니다. 교역하는 시장이나 사람 관계에서 사물들에게 적합치 못한 단어나 이름을 붙여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우상을 말합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규정한 언어가 왜곡을 일으킵니다. 아메리카 땅의 발견을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하는데 그곳에는 이미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학문적으로 중립적이라는데 실은 백인 중류층 남성의 견해가 다분히 녹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넷째는 극장의 우상입니다. 학문의 체계나 학파로부터 생기는 우상입니다. 자신의 소신은 전통이나 주류의 권위 아래 묻히고, 그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맹신합니다. 관람자가 되어 무대의 메시지를 경청하고 추종합니다.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의 신념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편견이나 우상들로 인해 우리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지적하는 가장 큰 적이 바로 이 편견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편견을 깨기 위해 오해 테크닉이라는 기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빵의 물질성에 사로잡혀 정작 먹어야 할 영의 빵을 보지 못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수를 찾았어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육체성에 갇혀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실상은 위로부터 곧 성령으로 나야 함을 지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모를 안다며, 그 나이가 오십이 되어 보이지 않는다며, 또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요7;52)는 한계에 갇혀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말은 무엇보다 이런 완고한 편견, 자기라는 아집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내 항아리가 가득 차고는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내 안경이 잘못되면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무슨 선한 것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이 말은 “한국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로 바꾸고 싶습니다. 이번 주에 있었던 박원순 시장의 죽음은 이런 생각을 더 짙게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가슴이 얹힌 것처럼 무겁고 허탈합니다. 일면식도 없지만 푸근한 아저씨처럼 TV나 언론을 통해 오랜 시간 보아왔기에 가까운 지인이 죽은 것보다 더 마음이 아픕니다.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 죽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인들이나 유명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심각하게 짚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왜 그럴까? 그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정치과잉입니다. 정치적 문제나 유명인의 일에 온국민이 게임보듯 지켜봅니다. 정치인들 이름을 줄줄이 알고 있고, 어떤 정책이나 사회적 문제가 터지면 온국민이 전문가가 됩니다. 황우석 유전자 조작 사건에서는 온국민 유전학자가 되었고, 검찰개혁에서는 모두가 법조인들이 되고, 미투 사건이 나면 그들의 사생활까지 샅샅이 침입합니다. 우리 어렸을 때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는 국모처럼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21세기에 살았다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약간은 신비적으로 가려졌기에 그렇게 미화되었습니다. 좀 사람을 그렇게 먼 거리에서 보면 안 됩니까? 시시콜콜히 그들의 사생활까지, 정책적 전문 지식까지 꼭 알아야 하는 겁니까? 인터넷이 좋기도 하지만 너무 많이 아는 것도 병입니다. 정책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자기 생활에나 충실한 그런 시대가 속히 왔으면 합니다.

이러다 보니 정치인이나 유명인들은 마치 투명한 어항에 사는 물고기처럼 되었습니다. 엄청난 부담입니다. 그냥 봐주면 안 됩니까? 좀 사람이 가려지는 부분도 있고 신비적으로 보여야 사람이 숨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정치인이나 유명인이 되려면 양심에 털이 나고 좀 뻔뻔스러워야 합니다. 보면 괜찮지만 예민한 사람은 자신의 작은 잘못에도 목숨을 끊고, 정작 중한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삽니다. 사람이 살려면 이런 뻔뻔함도 필요합니다. 대신 국가가 제대로 가려서 그에 합당한 형벌을 내리면 됩니다.

두 번째 생각해 볼 것은 우리 모두가 심판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론이나 댓글을 보면 자기가 왕이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나요? 그 속마음이 어땠고 어떤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 건가요? 내 자신에 대해서도 모를 때가 많은데? 한 사람의 생명이 사라진 엄청난 사건 앞에서도, 아직 확정되지 않은 가능성의 죄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있는 그들은 정말 정의로운 사람들인가요? 설사 그것이 죄였다할지라도 한 사람의 살아온 인생을 깡그리 무시하거나 경멸할 이유가 되는 건가요?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단지 그 죄가 드러난 자와 그렇지 않음의 차이일 뿐입니다. 양심 또는 인생의 버거움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한 한 사람 앞에 우리에게는 동병상련의 애도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판단하지 말라, 비방하지 말라는 것은 성서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를 놓고 마귀와 다툽니다. 아마 누가 그 시체를 가져가느냐는 논쟁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미가엘은 마귀를 저주하거나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유1:9)고 했을 뿐이며 유다 사도는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며 훈계합니다. 천사장도 절대적인 악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터넷이나 SNS의 글들은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계속 판단하려는 이들에게는 이 말씀이 적합합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2)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행태의 위험성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사람이나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누구 편이냐만 중요합니다. 자기 편이면 아무리 악해도 옹호하고, 자기 편이 아니면 왜곡하고 조롱합니다. 박원순 시장은 고 노무현 대통령 이래 가장 많은 비방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특히 보수 기독교계가 심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온국민이 가슴 아파해도 부족할 지경인데 이데올로기의 싸움의 한복판에 휘말렸습니다. 일전에는 세월호 유족들이 단식하고 있는데 그 앞에서 폭식 투쟁하는 기가 막힌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념의 죄는 살인죄와 방불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념 죄가 더 악할 수 있는 것은 확신에 차 있고 도무지 반성할 줄 모른다는 점입니다.

언론과 정치권이 이를 계속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이 이념성이 약화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에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이념성이 사라져야 한국사회에서 위대한 인물들이 탄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자기 편이 아니면 죽이기 위해 안달이 났습니다. 그러니 한국 사회에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습니까?

와서 보라

이런 편견을 깨는 방법 중 하나가 47절의 “와서 보라”입니다. 안드레와 요한이, 베드로가, 빌립이 와서 예수를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편견을 깨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소문으로, 말로는 부족합니다. 직접 보면 달라집니다. 제가 자주 드는 성현의 말씀인데 맹자의 측은지심이 이에 적절한 교훈입니다.

제선왕이 당상에 앉아 있었는데 그 앞으로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소는 제사에 바칠 소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가 두려워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제선왕의 눈에 역력히 보였습니다. 그러자 제선왕이 신하를 명하여 그 소를 살려 두라고 합니다. 대신 양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왕이 비싼 소는 살리고 싼 양을 바쳤다며 인색하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렇지만 맹자는 제선왕에 대해서 오히려 칭찬하며 이것이 인의 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소는 직접 보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금수가 살아 있는 것을 보면 그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며 그것이 애처롭게 우는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군자는 주방을 멀리 합니다.”

이것이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소의 불쌍한 모습을 보자 그 안에서 자비의 마음이 솟아났던 것입니다. 보았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요즘은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는 대면을 기피합니다. 실시간 화상이니 동영상이니 하여 회의도, 강의도, 예배도 그렇게 진행합니다. 접촉에 따른 감염의 위험은 피하겠지만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유튜브나 동영상은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직접 만나서 대화하다 보면 그 사람의 미세한 표정 변화나 동작을 예민하게 파악하고 반응합니다. 여기서 공감능력이 나옵니다. 디지털 정보만 주고받다보면 우리는 어떤 무감각한 냉혈한이 될지 모릅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N번방 사건의 당사자들이 디지털이 아니라 직접 고통받는 사람을 목격했다면 그런 악한 짓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요? 직접 보고도 동일한 짓을 계속했다면 그때는 악마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고, 수업 시간에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은 단지 주어진 정보 때문만은 아닙니다. 흐르는 땀과 냄새와 공기와 다른 사람들의 소리와 반응 등이 어우러져 우리는 별안간 깨달음을 얻습니다. 동영상 예배와 현장 예배는 받는 은혜와 그 강도가 다릅니다. 감염 위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대면이라는 선택을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대면의 영입니다. 우리 안에 임하셔서 2천 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에 경험케 하시는 영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와서 보라”고 초청하십니다. 이 생명의 초대에 마음을 열고 참여하여 풍성한 빵과 영원한 생수를 먹고 마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강해 16. 하늘이 열리고(요1:47-51)

이종철

   요힌복음강해 14. 시몬에서 베드로로(요1:37-42)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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