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 교회
  Home > 말씀이살아있고 > 설교동영상  

     
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2.9.

사무엘서강해 41
압살롬아 압살롬아


삼하18:1-19:8 (읽기18:6-33)
18:6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7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매 그 날 그 곳에서 전사자가 많아 이만 명에 이르렀고 8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9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10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11 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 12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13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 14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15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16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17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18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19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20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21 요압이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23 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24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25 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26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27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30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전쟁의 시작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전쟁입니다. 전쟁에 대한 실제 보도는 6절에서 8절 세 절 뿐입니다. 다윗의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이 싸웠고 이스라엘이 패하였는데 전사자가 2만 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한 사람 압살롬의 죽음에 맞추어졌습니다. 다윗은 전쟁을 시작하면서 전쟁 승리를 독려하지 않습니다.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5)며 명령합니다. 지휘관들이나 백성들은 이 말을 무겁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실제 전쟁에서 압살롬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주저하였습니다. 다윗은 전쟁에 승리한 후에도 기뻐하지 않았고 압살롬의 죽음에 더 애절하며 비탄에 사로잡힙니다. 요압이 이러다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며 협박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압살롬은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을 빼앗겼으며 나라가 두동강이 나서 한판 대전으로 승자를 가려야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성경이나 다윗은 모두 청년 압살롬 한 사람의 생사에 집중합니다. 일반 역사가라면 이때의 전쟁 방식이나 과정이나 그 결과에 더 흥미 있을 것입니다. 고대나 현대나 전쟁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전쟁만큼 폭력적이고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습니다. 정치나 승리나 큰 단위의 전략에 매몰되면 이 개인들의 죽음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엄청난 비극이 마치 전자오락 게임하듯 승패에만 매몰되어 사라집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 다윗의 모습이나 압살롬의 죽음은 전쟁이 가진 비극을 무엇보다 잘 보여줍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전쟁의 긴박감이나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록 왕이지만 평범한 민중들이 늘상 겪었던 동일한 비극의 한 양상을 보여줄 뿐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머리칼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머리칼이 상수리나무에 걸렸고 탔던 노새가 빠져나가는 바람에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참 희한하고도 코믹합니다. 이렇게 죽는 죽음도 있을까요? 앞에서 압살롬은 매년 머리칼을 한번 잘랐는데 그 무게가 2kg에 이르렀다 했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이 없이 아름답다던 압살롬의 매우 특이한 죽음입니다. 사실 우리를 죽음으로 모는 것은 나의 장기들이고, 나의 자랑거리들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너무 과신하거나 몰입하다가 죽음에 이릅니다. 조금 모자란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겸손하고 노력합니다. 좀 부족한 것에 만족해야 넘치지 않습니다.

군사들은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렸어도 바로 죽이지 못합니다. 다윗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을 죽였던 것은 요압입니다. 요압은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데 다윗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지체되는 것이 화가 났습니다. 요압은 지체없이 달려가 창으로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지도자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전쟁은 다윗 군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요압이란 인물은 사무엘서의 여러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요압은 사울 왕국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다윗의 명령으로 우리야를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압살롬을 복권시켰고 이제는 압살롬마저 직접 죽였습니다. 나중에는 압살롬의 군대장관 아마사도 죽입니다. 요압은 매우 냉철하게 다윗을 심기를 살폈던 사람입니다. 사람의 여러 모습이 있습니다. 선함과 욕망이 교차합니다. 그중에 다윗의 어두운 욕망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했던 사람이 요압입니다. 다윗이 꽃길을 갈 수 있도록 그 정적들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섰지만 결국 다윗의 폭주를 가속화시킨 인물입니다. 요압이 없었다면 다윗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요압은 충성스런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망나니 칼을 휘두르는 자입니까, 아니면 선한 길로 인도하는 자입니까? 요압은 결국 솔로몬이 등극하면서 그 보복을 피해 달아나다 제단 뿔을 잡은 채 죽임을 당합니다.

승리의 전령

성서에서는 전령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전령은 승리나 패배의 소식이나 전쟁의 개시를 알리는 전달자입니다. 전령은 기쁜 소식도, 나쁜 소식도 모두 전합니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는 헤르메스가 전령의 신으로 신의 뜻을 곳곳에 전합니다. 헤르메스는 날개 달린 신발과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빨리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령은 가장 빨리 소식을 전하기에 전쟁의 희비를 전달하기에 적합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전령간 속도 경쟁이 붙었습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자신이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원합니다.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전령은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요압은 다윗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22)고 하며 대신 구스 인을 전령으로 보냅니다. 구스 인은 아프리카 흑인입니다. 요압은 이질적인 인물을 전령으로 보냄으로써 다윗의 분노의 파장을 최소화하려 합니다. 자칫 구스 인은 분노한 다윗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사정이 그런데도 아히마아스는 한사코 자신이 전하겠다고 요압을 강권합니다.

이 때문에 두 명의 전령이 마치 경주하듯 달립니다. 다윗의 진영에서 이 모습이 보였습니다. 앞서서 달리고 있는 전령에 대한 소식을 파숫꾼이 전하자 다윗은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좋은) 소식이 있으리라”(25)고 말합니다. 70인역에서는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복음, 곧 기쁜 소식을 뜻합니다. 파수꾼이 이어서 그 뒤에 또 한 전령이 달려온다고 하자 다윗은 “그도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26)고 합니다. 첫 번째로 달려오는 전령이 아히마아스인 것을 확인하자 다윗은 기뻐하며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27)고 말합니다. 이럴 경우 보통은 하나는 좋은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소식이기 마련입니다. 아니면 둘 다 나쁜 소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연이어서 좋은 소식일 것이라 기대합니다. 다윗이 기대하는 좋은 소식은 무엇일까요? 하나는 다윗이 승리했다는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 압살롬은 살았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두 가지 다 기쁜 소식이 듣기는 쉽지 않습니다. 인생에는 굿뉴스와 베드뉴스가 함께 있습니다.

먼저 도착한 아히마아스는 승리의 소식은 전하지만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는 다윗의 물음에는 답을 하지 못합니다. 아히마아스는 다윗의 마음을 알고, 이미 요압의 경고를 들었기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고 답합니다. 거짓 보고이지만 아히마아스는 왕의 분노를 교묘히 피했습니다. 이어서 달려온 구스 인 전령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는 다윗의 질문에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32)며 압살롬의 죽음을 발설합니다. 이 구스 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은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싶습니다. 친구면 모르겠는데 왕이나 권력자 앞에서는 싫은 소리를 하려면 조심해야 합니다.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목이 잘립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왕 곁에 있는 지혜자들이나 점술가들은 교묘한 말을 잘하였습니다. 우스갯소리, 유머지만 어느 독재자가 자기가 언제까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점쟁이가 보니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암살당할 상입니다. 진실을 말하려니 해코지를 당할 것 같아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각하, 각하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 자리에 계실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 에서는 왕위를 찬탈한 맥베스를 현혹하는 말을 마녀가 전합니다. 버넘의 숲이 움직이지 않는 한, 또 여자에게서 태어난 것은 맥베스를 패배시키거나 결코 죽일 수 없다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암살당한 던컨 왕의 아들 맬컴이 버넘 숲이 움직이는 것처럼 나뭇가지를 들고 위장한 채 기습했습니다. 맥베스를 죽였던 맥더프는 제왕절개로 태어났기에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가 아니었습니다. 무녀의 예언은 교묘히 속인 것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는 교묘히 피하는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거짓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반대로 우리 인생에서 굿뉴스와 베드뉴스에 너무 휘둘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좋은 소식처럼 들리는 것이 안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베드뉴스가 오히려 우리에게 양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원하던 직장에 들어간 것이 새로운 고생의 시작일 수도 있고, 불합격한 것이 다른 길로 우리 인생을 열어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충고의 쓴 말이 양약이요, 축복의 단말이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다윗에게는 압살롬이 더 이상 적이 아닙니다. 다윗은 반복해서 압살롬을 “청년 압살롬”(15, 29, 32)이라 부릅니다. 청년이 아니라 어린 ‘아이’라는 뜻입니다(70인역, ‘파이다리온’). 압살롬은 반란의 수괴인데 다윗에게는 단지 아이이고 아들일 뿐입니다. 다윗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정말 슬퍼합니다. 18장 33절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19장 4절에서도 반복합니다.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쇼가 아니라 실제 자녀를 잃은 부모의 애절함입니다. 성서 어느 곳에서도 이런 비통함을 표현한 구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전쟁의 당사자들이지만 자녀를 잃었다는 점에서 여느 다른 부모와 다를 바 없는 고통입니다. 전쟁이라는 악을 고발하기 위해서도 다윗의 이 탄식은 더 울려 퍼져야 합니다. 다윗의 이 탄식은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처연한 모습을 그린 《피에타》 상을 떠올립니다. 예수의 고통은 모든 인간의 고통이고, 마리아의 모습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슬픔을 대변합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피에타(비탄)를 통해서 악과 불합리에 저항합니다.

현대판 피에타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가 있습니다. ≪게르니카≫는 독일군이 스페인 북부 게르니카란 지역을 1937년 4월 26일에 24대의 비행기로 무차별 폭격했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입니다. 한 도시에서 천여 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당했는데 전쟁사에서 최초의 편대비행에 의한 민간인 폭격이었다고 합니다. ≪게르니카≫는 세로 349cm, 가로 776cm에 이르는 대작입니다. 검은색과 회색의 무채색만 사용했고, 사람과 동물이 폭격당하는 장면을 단순한 선과 특징만 살려 표현했는데 무한한 슬픔과 공포가 밀려옵니다. 그중 그림 왼쪽의 죽은 아기를 안고 넋을 잃은 어머니는 가히 현대판 ‘피에타’입니다. 단순한 동그라미로 그린 아기의 뒤집힌 눈동자는 이보다 더 죽음을 죽음답게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힌 어머니의 넉 나간 표정을 보는 순간 세월호 참사에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들이 떠올랐습니다. ≪게르니카≫ 앞에서 가끔 펑펑 우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니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말의 울부짖음이나 죽은 병사의 늘어진 두 팔은 가공할 포탄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생명체의 공포와 무력함을 잘 보여줍니다.

다윗의 이 애절함은 더 절절하게 울려야 합니다. 그래야 전쟁의 야만이 그칩니다. 자신이 욕망을 좇아서 산 결과가 무엇인지를 절감합니다. 정신을 차립니다. 요압으로 대변되는 전쟁과 정치권력의 냉정함과, 다윗으로 대변되는 무력함과 애통이 비교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하늘의 위로가 모든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서강해 42. 왕의 귀환(삼하19:9-20:26)

이종철

   사무엘서강해 40. 인간의 수와 하나님의 생각(삼하17:1-29)

이종철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Puresunn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