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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20.2.2.

사무엘서강해 40
인간의 수와 하나님의 생각


삼하17:1-29 (읽기 1-24)
1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2 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3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니 4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5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6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 7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8 또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9 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에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10 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11 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12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그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13 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15 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고 나도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으니 16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전하기를 오늘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17 그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여종은 그들에게 나와서 말하고 그들은 가서 다윗 왕에게 알리더니 18 한 청년이 그들을 보고 압살롬에게 알린지라 그 두 사람이 빨리 달려서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19 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귀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매 전혀 알지 못하더라 20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하니 여인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그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21 그들이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가서 다윗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22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까지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23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 24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아히도벨과 후새의 모략 대결

무대는 다시 압살롬 진영입니다. 압살롬과 그와 함께 한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16:15). 카메라의 렌즈는 압살롬 곁에 있는 모략가들을 향합니다. 아히도벨과 후새가 지략 대결을 펼칩니다. 지금껏 압살롬 곁에서 압살롬의 승리를 이끌었던 것은 아히도벨이었습니다. 그는 헤브론의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다윗은 다른 누구보다 아히도벨을 경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압살롬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도 지시하였습니다. 그의 지략이 얼마나 뛰어난 지 23절에서는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왕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사들의 대결은 흥미진진한데 단연 성경이 원조이고 압권입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탁월한 지략을 제안했습니다. 자기가 병사 1만2천 명을 끌고서 다윗을 기습하겠다는 것입니다. 가서 다윗 왕만 죽이면 전쟁은 끝난다 하였습니다. 다윗은 지금 전의상실 상태로 달아나고 있고 재빨리 기습한다면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승리한다는 좋은 계략이었습니다. 모두가 이 계략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압살롬은 후새의 말도 들어보자고 합니다.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무언가 두려워서였습니까?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략이 좋지 않다 평가합니다. 다윗은 영웅이요, 그의 부하들은 다 용사입니다. 그들은 지금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한 상태입니다. 다윗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어느 굴에 피해 있어 찾기 쉽지 않습니다.(8-9) 만약 기습했다가 실패하면 사람들이 낙담하게 되고 전쟁의 승기를 잃게 될 것입니다. 후새의 세 치 혀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자신들은 지금 정당하지 못합니다. 다윗은 영웅입니다. 조금의 자극에도 그들은 움츠러들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후새는 사람들의 호승심을 자극합니다.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아서 전면전을 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가 많으니 공격하면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저들을 다 젖게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윗이 어느 성에 숨었으면 압도적인 수의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묶어서 강으로 끌고가 쳐박으면 성에 작은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13). 후새의 화려한 언변에 압살롬과 신하들은 갑자기 자기들이 이미 승리한 것 같은 착각에 부풀었습니다. 거짓은 이처럼 많은 말과 장황한 환상의 모습을 취합니다. 우리가 가진 두려움과 허위의식을 자극합니다. 사람들은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며 후새의 계략을 따르기로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현명한 결정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미혹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14) 아히도벨은 좋은 계략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후새의 세치 혀에 미혹당했습니다. 이를 달리 미혹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열왕기의 아합 왕이 이 미혹의 영에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자 아합을 죽이기 위해 하늘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왕상22:20) 그때 한 영이 나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22) 그 거짓말하는 영이 선지자들을 속여서 아합에게 출전하며 승리할 것이라 합니다. 미가야 선지자만 미혹되지 않았고 그 사실을 밝힙니다. 결국 미혹의 영에 당한 아합은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오늘도 미혹하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를 잘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미혹하는 영은 목회자나 정치가나 언론이나 아니면 의도적인 사기꾼들이 잘 사용합니다. 잘 분별해야 합니다. 가짜뉴스에 휘둘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신앙인들이 더 심합니다. 요즘 은퇴한 목회자나 제법 큰 교회했다는 목회자들이 유튜브의 말에 현혹되는 모습을 보면 한심하기조차 합니다. 미혹되는 이유는 그들의 언변이 화려해서도 그렇지만 주된 이유는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인 눈으로 판단하면 되는데 자기 욕심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아니면 이미 가진 선입관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아히도벨은 대단한 지략가입니다. 정확히 승리하는 법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똑똑해서 탈이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왕과 백성들이라면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고향으로 내려가서 집을 정리하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어버렸습니다. 아히도벨은 실상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인생이나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데 자기 생각을 확신한 나머지 섣부른 결정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결정적인 잘못은 그 좋은 능력으로 어리석은 왕과 잘못된 주인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스파이들

아히도벨의 모략을 저지한 후새는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려 합니다. 위험하니 빨리 요단강을 건너가라는 첩보입니다. 여종이 성 밖의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이 내용을 전달합니다. 두 사람이 다윗에게 가야하는데 그만 발각이 되어 추격을 당했습니다. 바후림이란 곳에 있는 어느 집에 숨어들었습니다. 그 집 여인은 이들을 우물에 내려가게 하고는 그 아귀를 덮고 그 위에 찧은 곡식을 널어놓았습니다. 쫓아온 추적자들이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그들이 시내를 건너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추적자들은 더 이상 추격을 멈추고 돌아갑니다. 드라마에서 전형적으로 나오는 스파이 씬입니다.

스파이들을 숨겨주는 전형은 여호수아서의 기생 라합이 대표적입니다. 지붕의 벌여놓은 삼대 사이에 두 정탐꾼을 숨기고는 병사들이 이들의 행방을 묻자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다”(수2:5)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그들을 자기 집 들창문을 통해서 탈출시키기까지 합니다. 성경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속고 속이는 거짓말을 즐깁니다. 오히려 신약시대 사는 우리들이 정직성이나 거짓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 예민합니다. 거짓말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에서는 어쩔 수 없이 거짓을 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선의의 거짓말입니다. 그게 현실이고 성서는 인생의 현실을 인정합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선한 목적을 위해 우리는 거짓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악의적이고, 자기 욕심을 위한 거짓은 죄입니다.

후새라는 인물의 삶도 그랬습니다. 후새는 압살롬을 속였습니다. 다윗의 명령으로 예루살렘에 남은 후새는 압살롬을 만나자마자 아첨하듯이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16:17)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참 교묘합니다. 누구를 위한 만세입니까? 압살롬인지 다윗 왕인지 아리송합니다. 입살롬이 당신은 다윗의 친구인데 어째서 다윗을 따라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18)고 말합니다. 이 말도 교묘합니다.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19) 끝까지 압살롬이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아들, 왕이라고만 했을 뿐입니다. 아들은 솔로몬도 될 수 있습니다. 교묘한 처세술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이는 칸트가 했던 거짓말과 유사합니다. 칸트는 정언 명령이라고 하여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의무”는 어떤 순간에도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살인자 앞에서도 지켜야 한다고 했는데 거짓을 말하기 싫다면 회피의 방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칸트 자신이 선택한 적이 있는 방법입니다. 칸트가 쓴 글들을 당시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좋지 않게 보았습니다.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비방이라 생각하고 다시는 그런 주제를 다루지 않겠다는 서약을 요구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칸트는 다음과 같은 서약을 했습니다. “폐하의 충실한 신하로서 종교에 관한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쓰지 않겠습니다.” 이 서약 이후 얼마 안 가 황제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칸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종교 강연을 하고 다녔습니다. 이를 비난하자 칸트는 “폐하의 충실한 신하로서”라는 전제가 무효가 되었으니 이 서약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변명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꼼수입니다. 그러나 칸트는 꼼수를 부리는 것이 오히려 노골적으로 거짓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나름 칸트에게는 회피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는 100% 정직이나 100% 순수함의 신화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허상입니다.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과 그리스도라는 두 주인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신앙인들은 지혜롭게 처신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때문에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십시오.

원수의 목전에서

드디어 대회전입니다(24).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은 길르앗에 진을 쳤고 다윗은 마하나임 쪽에 진을 쳤습니다. 압살롬은 수가 많지만 이익을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 이익의 소망이 끊어지는 순간 순식간에 흩어지고 마는 그런 무리들일 뿐입니다. 반면에 다윗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은데 의리의 사람들입니다. 27절에서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가 언급되는데 암몬 족속은 사울 때나 다윗 대에 이스라엘 동쪽을 괴롭혔던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윗 편에 서서 싸웁니다. 완전히 복속되었고 또 마음까지 주었습니다. 또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언급되는데 19장에서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다”(19:32)고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부유한 자들이 다윗을 도왔습니다.

이들은 다윗에게 올 때 많은 음식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28절과 29절입니다.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다윗은 가는 곳마다 먹을 것으로 대접받습니다. 이 장면에서 생각나는 말씀은 시편 23편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여기 상은 밥상을 말합니다. 늑대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양떼들에게 선한 목자는 싱싱하고 맛있는 꼴로 대접합니다. 양들은 원수들이 목전에 있지만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편안함과 여유입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가난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고 격려합니다. 바울 수중에 돈은 없지만 그는 결코 배를 곯거나 풍족하지 않은 식탁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수가 목전에 있음에도 편안과 감사로 밥을 먹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저축된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늘 풍성한 식탁으로 복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사무엘서강해 41. 압살롬아 압살롬아(삼하18:1-19:8)

이종철

   사무엘서강해 39. 피난 길에 오른 다윗(삼하15:13-16:23)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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