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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 설교 2020.1.5.

사무엘서강해 36
권력자 다윗의 추락


삼하12:1-31 (읽기 1-25)
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2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3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4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5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6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15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18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19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2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하나님의 심판

신년 첫 예배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다윗의 죄에 머물러 있습니다. 실상 달력만 바뀌었을 뿐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인간사가 싹 바뀌겠습니까? 인간이 가진 탐욕과 무지와 고집과 실패는 여전합니다. 그렇지만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윗의 죄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일단 문제의 전말이 보이면 어떤 식으로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다윗이 자기 죄를 외면하지 않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처음에 다윗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처리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권력자입니다. 죄가 드러나더라도 덮어버릴 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속이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윗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11:27) 어떤 은밀한 죄도 하나님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죄는 지금 모든 정보를 간직한 채 우주 공간에 파장을 일으키며 빛의 속도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 나단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를 감추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죄는 그냥 사라지지 않고 썩고 확대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처리되어야 하는데 이생에서 안 되면 내생에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나단은 다윗에게 가서 당신이 악한 일을 행했습니다라며 곧바로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비유로 말을 전했습니다. 한 성읍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았지만 가난한 자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그 암양 새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함께 자고 함께 먹고 딸처럼 품고 잘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찾아오자 자기 양과 소를 잡는 것을 아깝게 여긴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 그것으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 비유를 듣자 다윗은 분노했습니다. 죽어 마땅한 놈이라 하며, 네 배로 보상해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얽혀버렸습니다. 자기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분노했으니 자기 말을 뒤집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직설적으로 다윗의 죄를 지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직선적인 길로 가지 않고 비유를 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의 죄를 확실히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권력자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묵살해버릴 수 있습니다.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이런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지만 인간 사회는 어쩔 수 없습니다. 죄를 감추려는 인간의 완악함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의인도 악인들만큼 집요해야 합니다. 악과 싸우기 위해서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문제의 실상이 명확해지자 나단은 “당신이 그 사람이다”(7절, 앗타 하 이샤)며 곧바로 다윗의 죄를 지적합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신이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듯이 탐욕에 빠지면 죄가 보이질 않습니다. ‘이 건 사랑이야.’ ‘상대방도 동의했어.’ ‘어쩔 수 없었어.’ 하며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비유로 설명하니 다윗의 죄가 명확히 보입니다.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을 부요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8)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것 조금 잃는 것이 아까워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부자에게는 작을지 모르지만 가난한 자에게는 전 재산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대기업이 골목상권의 작은 이익을 빼앗는 모습이 이와 같다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더 가지려 가난한 자의 것을 탐내면 안 됩니다. 인색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많이 받은 만큼 많이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다윗은 우리아라는 가난한 사람을 치고, 죽이고, 그 소유를 빼앗았습니다(9).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 행한 범죄라는 사실입니다. 9절입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단순한 탐욕이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업신여겼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 약자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돌보는 백성입니다. 그들을 힘들게 하고 그들의 것을 빼앗는 것은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일입니다. 예언자들의 일관된 메시지이고, 현대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한 정치적 발언을 한다면 이런 사회적 불평등이나 불의의 문제입니다. 정치 참여한답시고 권력의 문제나 이념의 문제를 교회에서 들먹이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했던 행태일 뿐입니다.

다윗의 회개

다윗의 위대함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나단의 지적에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13절, 핫타티 라야훼)라 시인합니다. 권력자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만약에 똑같은 말을 그 아들 압살롬에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그 충언자를 당장 죽이고 말았을 것입니다. 권력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잘못이나 연약함을 인정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라도 아니고 교회라는 조그만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놓치기 싫어, 자기 잘못을 합리화거나 힘으로 억누르려는 한국의 소위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모습은 얼마나 가련합니까?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죄의 대가는 받아야 합니다. 다윗이 범한 죄의 대가는 컸습니다. 11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다윗의 집안에는 끊임없는 권력 다툼이 있고 이 때문에 큰 전쟁이 나고 아들들을 잃습니다. 지도자의 잘못과 그에 대한 심판은 그 한 사람에 그치지 않습니다. 나라나 공동체나 가정이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운명입니다. 그러니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하고 잘 감시해서 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의 죄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용서라는 것이 너무 쉽습니다. 나단도 다윗이 죄를 인정하자 너무 쉽게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않을 것이다”(13)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은 용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은 또 한 번의 기회를 준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죄는 어떤 결과나 피해를 남기고 그에 대한 처리나 보상은 죄를 저지른 자가 해야 합니다. 용서는 가능하지만 죄의 대가는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이런 죄의 결과를 처리하면서 완성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범한 죄의 열매를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습니다. 불륜의 관계에서 낳은 아들이 죽게 되자 다윗은 금식하며 밤새도록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불륜의 자식이기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양심에 걸려 무책임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불륜의 자식일망정 일단 벌어진 후에는 자기 자식처럼 취급했습니다. 자식이 무슨 죄입니까? 하도 그 모습이 간절해서 결국 그 아들이 죽자 신하들은 차마 말을 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자리에서 툴툴 털고 일어났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한 후 음식을 먹은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습니다. 의아해하는 신하들을 향하여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22-23) 다윗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다 안 되면 빨리 손을 떼는 것이 낫습니다. 이미 돌이키지 못하는데 미련을 갖거나 원망을 품는다면 전혀 무익합니다. 이 때문에 이후의 인생도 망칩니다. 이미 엎질러진 것은 그대로 인정하고 미래를 향하여 새롭게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장점입니다. 현실을 잘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해결점을 찾아간다는 점입니다.
    
다윗의 회복

죄를 인정하고 죄의 대가를 받아들이자 다윗은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로 불렸던 밧세바는 이제 “그의 아내 밧세바”(24)라 불립니다. 둘 사이에서 새로운 아이를 주셨는데 그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에는 평화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이지만 이 아이를 통해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람입니다. 달리는 ‘여디디야’라 부릅니다. “여호와께서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잘못된 만남이고 잘못된 인연인데 하나님은 이를 계기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 인생의 잘못된 것들은 과감히 도려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완전히 끊거나 무시하고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 번 뿐이고, 인생은 연필로 쓴 것처럼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엉망인 것을 끌어안고 가야 합니다.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이 서예를 배우면서 깨달은 것이었는데 서예는 조화라는 것입니다. 글자를 쓰다가 잘못되면 서예의 특성상 고칠 수 없기에 다음 글자를 통해서 그 실수를 보상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 획을 쓰다가 좀 뉘어지면 다른 획을 세워서 그 획에 잘못된 것을 고칩니다. 이렇게 잘못된 한 획 한 획이 모여 온전한 한 글자가 됩니다. 글을 쓰다가 한 행이 잘못되면 다음 행으로 보충하고, 한 연이 잘못되면 다음 연에서 바로잡습니다. 그래서 한 편의 아름다운 글이 만들어집니다. 부분 부분이 모두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보다 이렇게 실수와 실수, 거기에 대한 보상과 보충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글은 훨씬 정감 있습니다.

우리 인생 또한 그렇습니다. 실수하고 보충하고, 실수하고 보충하고 그러다가 우리 인생이라는 작품이 완성됩니다. 사울은 엉망이 된 자기 인생을 그냥 포기해 버렸습니다. 자기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수한 것을 보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완전한 실패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는 이 말씀을 붙잡고 다시 시작합니다. 자기 있는 데서, 자기 실수한 데서 우리는 다시 일어섭니다.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아름다운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11장 1절에서 시작되었던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암몬의 수도인 랍바를 점령하는 최후의 영광을 군사령관 요압은 다윗에게 넘겼고, 다윗은 그 영광을 취합니다. 그 동안에 다윗이 한 일이라고는 불륜을 저지르고 이를 무마하다 많은 살인을 저지른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승리의 영광을 누립니다. 세상은 이러할 때 쉽게 자기 죄가 용서받았다거나 자신이 다시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착각을 합니다. 착각입니다. 멀리 어두움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13장 이후로 아들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고 결국 나라가 두 동강 나는 비극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작은 승리에 취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잘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더 큰 죄의 유혹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다 크게 넘어질 것입니다. 이 승리의 영광을 취하는 다윗은 부끄러운 마음일까요? 아니면 영광에 취해 있을까요? 부끄러워한다면 그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심으로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망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복되고 다시 일어서길 바라십니다. 자신의 잘못들을 보충하며 아름다운 인생의 작품을 써 내려가길 원하십니다.


   사무엘서강해 37. 암논 다말 압살롬(삼하13:1-39)

이종철

   사무엘서강해 35. 다윗의 실패와 밧세바 사건(삼하11:1-27)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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