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 교회
  Home > 말씀이살아있고 > 설교동영상  

     
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19.12.29.

사무엘서강해 35
다윗의 실패와 밧세바 사건


삼하11:1-27
1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2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6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7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8 그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9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의 주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잔지라 10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되 우리아가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1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12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머무니라 이튿날 13 다윗이 그를 불러서 그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 때에 그가 나가서 그의 주의 부하들과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14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1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16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17 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18 요압이 사람을 보내 그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보고할새 19 그 전령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보고하기를 마친 후에 20 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그들이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21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 위에 던지매 그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22 전령이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이 그를 보낸 모든 일을 다윗에게 아뢰어 23 이르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세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오므로 우리가 그들을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24 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부하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니 25 다윗이 전령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하니라 26 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 27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다윗의 실패

신약성경은 마태복음부터 시작합니다. 그 첫 장이 누구는 누구를 낳고 하는 족보이기에 재미가 좀 없습니다. 그러나 족보도 정성껏 읽으면 은혜가 됩니다. 그렇지만 읽다가 당황스럽게 만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영광스런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에 다말이나 룻 등 이방 여인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만,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1:6)에서는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솔로몬의 어머니는 밧세바인데 그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라 합니다. 영광스런 족보에, 그것도 솔로몬의 출생에 왜 다윗이 아닌 다른 남자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까? 다윗은 불륜 관계를 통하여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취했습니다. 이를 언급함으로써 성경은 소위 영광스러운 다윗 왕가라는 것도 얼마나 형편없었던가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영광됨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다른 한 편 성경은 밧세바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한 여인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 읽은 11장 말씀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작 피해를 당하고 자기 남편을 빼앗긴 여인은 밧세바인데, 밧세바의 처지나 생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악을 꾸민 것도 다윗이요, 악을 무마하려는 것도 다윗이고, 이 과정에 많은 남자들이 등장하지만 정작 희생자인 밧세바는 말이 없습니다. 유일한 말이란 것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된 “내가 임신하였나이다”(5)는 한 마디뿐입니다. 성경 또한 피해자인 여성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 매우 가부장적인 책입니까? 이전까지는 이런 남성중심적인 읽기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성차별이나 양성평등의 시각을 갖게 된 현대인들은 그 이면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남성들의 권력놀음에 침묵당하고 있는 피해자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이 또한 숨겨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서는 공백들과 어두움들이 있고 그 빈 곳은 해석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침묵은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성령의 각성으로 이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일단은 겉으로 드러난 내용들을 살피며 그 의미를 추적하겠습니다. 다윗은 실패했습니다. 다윗은 그동안 성공가도만 달려왔습니다. 지금부터는 추락의 연속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교훈입니다. 인생에는 오르막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내려올 때는 조심조심 잘 내려와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 길이 낭떨어지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실패는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2) 지금 이스라엘 군대는 암몬과 싸우기 위해 총출동했습니다. 그런데 왕이란 자가 한가로이 후방의 왕궁에 머물러 있습니다. 늘어지게 잠을 자다가 저녁 무렵에 깨어 한가로이 왕궁 옥상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나태해져 있습니다. 이미 목표한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제 절대적인 군주입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 세우신 뜻을 잊고는 권력의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권력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반율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게 만듭니다. 아무도 자신을 견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하였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성취감이 인간을 노쇠하거나 추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그날까지 목표가 있기를 바라고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다윗과 우리아

죄는 흔적을 남깁니다. 불륜의 대가는 임신이었습니다. 죄가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다윗은 이를 덮으려 합니다. 바로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이 살다가 순간적으로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발각된 후에는 이를 인정하고 돌이키면 죄의 영향력을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덮으려 하다가 자꾸 무리수를 두게 만들고 결국은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데까지 이릅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죄도 자라고 확대됩니다. 다윗은 정확히 그 죽음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욕망이 주는 즐거움은 짧았고, 그 사망의 열매는 쓰고 오래 갑니다. 다윗은 전선에 있는 우리아를 불러들였습니다. 밧세바와 동침시켜서 자신의 죄의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입니다. 이런 과정들을 성경은 재미있다는 듯이 장황하고, 또 극적이라고 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서술합니다. 이 또한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한 대로 되지 않고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다윗은 우리아에게 7절에서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싸움의 안부’가 더 정확한 번역인데 세 번의 ‘샬롬’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평화와는 다른, 좀 불길한 미래를 암시합니다. 8절에서 13절을 이끄는 단어는 ‘내려가라’입니다. 다윗은 안타까울 정도로 우리아에게 집으로 내려갈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다윗은 급기야 술을 잔뜩 먹여서 집에 가도록 하려 하지만 우리아는 이에 현혹되지 않고 밖에서 야영을 합니다. 우리아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단호함을 보입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11)

우리아는 매우 충실한 군인입니다. 실제 이스라엘의 전쟁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전쟁이기에 성결해야 하고 때로는 금욕이 명령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그는 정통 유대인이 아닌 이방 족속인 헷 족속 출신입니다. 우리아는 신실하고 다윗은 욕망의 화신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아는 성실한데 다윗은 놀고 먹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 가고 있는데 우리아는 그 다윗을 위해서 충실히 싸우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런 태도는 우리의 혀를 차게 합니다. 혹시 우리아는 자기 아내의 불륜의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이는 우리아의 저항입니다. 막강한 권력 앞에서 약자가 어떻게 달리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신실한 모습이 권력을 안절부절하게 만듭니다.

다윗은 애가 탔습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태양처럼 손으로 가리기가 어렵습니다. 하나의 거짓을 덮기 위해서는 스무 개의 거짓이 필요합니다. 죄는 그 목적을 이루기까지 집요하게 우리를 유혹하고 결국은 파멸로 몰아갑니다.

살인교사

자신의 의도가 실패하자 이제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기로 계획합니다. 전선으로 돌아가는 우리아의 손에 사령관 요압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보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우리아를 최전선에 배치하여 죽게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우리아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사형선고문이 담긴 편지를 자기 손으로 들고 가고 있습니다. 세익스피어 드라마 햄릿에서도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햄릿의 숙부는 영국 왕에게 햄릿을 보는 즉시 죽이라는 편지를 햄릿의 손에 들려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도중에 읽었던 햄릿은 숙부의 계획을 무위로 돌렸는데 우리아는 그 편지를 뜯어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설사 의심했다 해도 이렇게까지 악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악은 가공할 정도로 한 사람을 잔인하게 만듭니다.

요압은 그 부당함에 대해서 항의하거나 그 이유를 묻지 않고 다윗의 명령을 충실히 집행합니다. 요압은 죄가 없나요? 왕이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고 나중에 하나님께 변명할 수 있을까요? 악은 저항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악에 동조하는 순간 우리도 악인이 됩니다. 요압은 우리아를 최전선에 배치하여 우리아를 죽게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다윗의 군사들도 몇 명 죽임을 당합니다. 악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살인교사 명령을 집행한 요압은 이를 다윗에게 보고하는데 나름 철저한 대비를 합니다. 요압은 다윗의 반응을 미리 헤아린다는 듯이 전령에게 말합니다. ‘왕이 성 위에서 여인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은 사사기의 아비멜렉의 비극을 들먹이며 요압의 전술이 잘못되었다고 책망할지도 모른다.’ 이는 다윗이 자신에게 책임을 덮어 씌우려는 음모에 대한 요압의 방어입니다. 권력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건을 은폐하려 합니다. 요압은 그때 결정적인 이 말을 하라고 전합니다.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21)

그런데 전령은 이런 식으로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돌직구 던지듯이 다윗이 반응하기도 전에 우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먼저 전합니다. 전령도 이미 내막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전령은 ‘왕의’ 부하, ‘왕의’ 종 우리아란 말을 반복합니다. 마치 당신의 종을 당신이 죽였소 하는 책망 같습니다.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고 다윗만이 다른 사람들을 완벽히 속였다고 믿고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악이나 거짓된 욕망은 벌거숭이 임금처럼 뻔한 것을 못 보게 만들고 속입니다. 다윗은 요압에게 더 이상 책임을 전가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25)

다윗과 밧세바

다윗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감추어졌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인하여 소리내어 웁니다. “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26) 끝까지 밧세바는 자기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라 불립니다. 여기 소유격이 반복되는데 다윗의 소유가 아니라는 강조입니다. 다윗의 악을 폭로하는 성경의 저항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 여성의 주체성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장례를 마친 후 다윗은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와 자기 아내로 삼습니다. 이후에 결국 이 불륜의 자식을 낳기까지 합니다. 이는 좀 의외의 결정입니다. 다윗으로서는 우리아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은 자기 죄를 온 천하에 폭로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냥 모른 채 하거나, 밧세바도 죽이거나 아니면 적당히 협박하는 것이 대부분 범죄의 진행과정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정말 사랑했기에 그랬을까요? 아니면 다윗이 잘못을 깨닫고 자신이 망친 여인을 거두어들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한데 밧세바가 다윗의 죄를 폭로하겠다고 하며 협박했을 수도 있습니다. 책임지라는 식입니다. 나중에 늙은 다윗을 설득하여 자기 아들 솔로몬을 왕위에 세워 놓는 것을 볼 때 밧세바가 그저 평범한 여성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밧세바가 일부러 옥상에서 목욕하며 다윗을 적극적으로 유혹했다거나, 일이 벌어진 이후에는 최소한 공범이라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는 식의 판단은 옳지 않습니다. 다만 밧세바는 일이 벌어진 후 자기 살 길을 모색했을 뿐입니다. 그저 당했다고 탄식하거나 대책없이 저항하거나 목숨을 끊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삶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밧세바는 현명했습니다. 배가 파선되고 살기 위해 자기를 전복시킨 배에 승선했는데 그 게 자신을 다른 목적지로 이끌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욕심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계획한 대로, 우리가 욕망한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우리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 왕조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내가 장수하고 부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생은 우연과 우발적 사건으로 진행되지만 합력하여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가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사무엘서강해 36. 권력자 다윗의 추락(삼하12:1-31)

이종철

   사무엘서강해 34. 다윗의 꿈의 실현, 강대한 나라(삼하8:1-10:19)

이종철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Puresunn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