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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19.12.1.

사무엘서강해 31
하나님의 법궤가 다윗성으로


삼하6:1-23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하나님의 법궤

사무엘상 7장 이래로 오랫동안 실종되었던 하나님의 법궤가 다시 등장합니다. 사울 통치 기간에는 법궤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제사장 아미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법궤는 곧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법궤를 모셔오는 것은 하나님을 모셔오는 것과 같습니다. 2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하나님의 법궤라 불리는 이유는 그 안에 모세에게 주었던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법궤는 그 속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덮개도 중요합니다. 덮개는 달리 시은좌라 불립니다. 은혜의 보좌인데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이기에 위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보좌를 지키는 것이 그룹들이며 그룹들이 궤 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보좌를 날개로 덮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룹들은 천사를 말하는데 그 형상이 맹수와 인간의 형상으로 기괴합니다.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에서는 지성소에 두 날개를 펼친 사자 형상의 그룹이 이 법궤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룹들의 호위를 받는 덮개 위가 바로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법궤와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여호와 체바오트로 많은 군대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천사들이 그의 군대일 수 있고, 이스라엘이 그 군대일 수 있습니다. 군대를 사열하거나 지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은 주로 전쟁과 관련되어 그 이름이 불립니다. 이스라엘의 전선에서, 이스라엘 편에 서서 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쿰마 야훼!”는 법궤가 높이 들릴 때 외치는 소리입니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보며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오늘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들이는 장면은 군사 3만 명이 동원되었고 마치 승리한 군대의 시가행진과 같습니다.

다윗은 아미나답의 집에 있던 법궤를 다윗 성 곧 예루살렘 성으로 들이고 있습니다. 이 법궤는 이후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 성전이 완성되면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법궤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성도가 되었고 정통성이 유다 왕국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법궤를 들이는 다윗의 행동은 순수하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볼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하나님을 끌어들여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작업입니다. 하나님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에서 고고하게 다스리는 분이 아닙니다. 특정한 민족, 특정한 왕조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좇는 법이고, 그렇게 할 때 복이 주어짐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이 특정 왕조의 신학에 기여할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그렇게 선택받은 왕조가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예루살렘이 성도가 되고 유일한 하나님의 보좌가 되는 과정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신14:23, 16:2 등)이란 표현이 자주 언급되지만 그곳이 정확히 예루살렘이라 꼭 집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 택하신 곳을 예루살렘으로 만든 것이 다윗입니다. 예루살렘이 성도가 되기까지는 예언자들과 다윗 왕조의 끈질긴 싸움이 있었습니다. 열왕기 서에서 역대 왕들에 대한 평가에서 ‘산당을 제거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예루살렘 외에 다른 곳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성소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히스기야나 요시야의 중요한 치적 중 하나는 바로 이 지방 성소를 없애고 예루살렘 단일성을 회복한 것입니다. 거룩한 도시는 처음부터 거룩한 도시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투쟁 과정에서 성도로 인정받았습니다.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며 다윗은 바로 그 첫 작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베레스 웃사

감격스럽고 거룩한 순간인데 그만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법궤를 실은 수레의 소가 날뛰자 법궤가 넘어질 것 같으니까 그 주변에 있던 제사장 웃사가 손으로 법궤를 잡다가 그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를 손으로 잡으면 안 됩니다. 실은 법궤는 수레에 실어서도 안 됩니다. 법궤에는 네 개의 고리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매고 행진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입니다. 더 예를 갖춘 방법이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었는지 율법에 어긋나게 법궤를 수레에 실었다가 이런 소동이 났습니다.

이 지명을 베레스 웃사라 하였는데 ‘웃사를 쳤다, 찢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앞서 “다윗이 분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이 화를 낸 이유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의 정성을 받아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화를 낸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법대로 하지 않아 큰일을 망친 자신이나 웃사에 대한 분노였을까요? 어찌 되었든 그 결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9)

이는 다윗에게 날린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하나님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까다로우신 분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다윗에게는 뜻밖의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경고가 많아집니다. 그만큼 다윗이 많은 것을 가졌고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도 다윗은 여러 번 하나님께 혼이 납니다. 밧세바 사건 때, 아들 압살롬의 반란 때, 인구조사하다가 등. 익숙한 것이 좋지만 익숙해지면 경계심이 없어집니다. 많은 것을 갖게 되면 더 이상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인 양 착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다윗처럼 이렇게 경고 받을 때가 복입니다.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장점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는 바꿀 줄 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가 내려올 때 이를 가볍게 여기거나 변명으로 일관하다가는 우리는 사울의 길로 끝날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둔감해져서 하나님의 뜻도 분별 못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에서 소위 유명하다는 많은 지도자들이 지금 그런 길을 걷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며 한국교회의 타락은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도록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지 말씀을 이용하라고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결국 이 법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왔고 솔로몬 때는 성전 안의 지성소에 이 법궤가 모셔집니다. 하나님이 한 왕조를 택하셔서 자신의 뜻을 보이셨는데 이는 자유로우신 하나님이 제한당하는 일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특정 공간과 시간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될 때는 하나님도 망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문에 선지자들은 예루살렘 성전보다는 출애굽 광야시대의 성막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성막은 초라하지만 성전처럼 장소에 매이지 않습니다. 성막의 법궤는 인간사의 이해나 애환에 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유를 상징합니다.

에스겔이 포로된 땅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환상은 하늘의 법궤의 모습이었습니다. 불의 전차 같은 모습으로 어거보좌란 불리기도 합니다. 눈이 가득 달린 수레바퀴 위에 스랍이라 불리는 네 생물이 있습니다. 이 생물들은 맹수와 인간의 형상이고 불 붙는 모습입니다. 바로 그 위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이 모습이 상징하는 것은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신약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유로움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이나 그리심산에 있다고 착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영이심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이 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장소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말씀합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려면 같은 성령과 그리스도라는 진리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하나님의 두려움을 경험한 다윗은 한동안 법궤를 옮겨오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3개월 동안 하나님은 그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자 다윗의 마음에 다시 법궤를 향한 열심이 솟습니다. 이번에는 의례적이거나 교만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모셔오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수레가 아니라 제사장들이 직접 들고 옵니다. 여섯 걸음을 걸을 때마다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장 달라진 것은 다윗의 태도입니다. 그는 이 일을 정략적인 행사 정도가 아니라 정말 기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12),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너무 기쁘게 춤을 추다 보니 에봇이 너풀거려 알몸이 그대로 노출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의 아내 미갈은 이를 보며 왕이 체신머리 없다고 비방합니다. 다윗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어떠한 짓도 할 수 있다며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양과 같습니다. 안전하고 배부른 어린 양은 푸른 초장을 이리저리 뛰놉니다.

다윗은 의무감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요리문답 제 1문의 답은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함이다”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거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는 있지만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정수, 신앙생활의 최고봉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단계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체면을 잃을 정도로 즐거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뛰놀고 있습니다. 동양에서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말합니다. 의무이거나 의지로 하는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즐거워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일을 행합니다. 찾아서 하고 누가 말려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단계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억지로 끌려서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즐겁고, 말씀이 즐겁고, 예배가 즐겁고, 순종이 즐겁고, 교회가 즐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서 임마누엘로 함께 하는 하나님을 보며 그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서강해 32. 다윗 언약, 네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7:1-17)

이종철

   사무엘서강해 30. 예루살렘 시대의 개막(삼하4:1-5:25)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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