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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19.11.17.

사무엘서강해 29
헤브론에서 다윗이 왕이 되다


삼하2:1-3:39 (읽기 2:1-23)
1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2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3 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 4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5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6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7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삼았음이니라 하니라 8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9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10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 세이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11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칠 년 육 개월이더라 12 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 기브온에 이르고 13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 기브온 못 가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앉으니 이는 못 이쪽이요 그는 못 저쪽이라 14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청년들에게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 요압이 이르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15 그들이 일어나 그 수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두 명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두 명이라 16 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헬갓 핫수림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 17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18 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빠르더라 19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20 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이르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나로라 21 아브넬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가서 청년 하나를 붙잡아 그의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그의 뒤를 쫓으매 22 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23 그가 물러가기를 거절하매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의 배를 찌르니 창이 그의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이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

헤브론으로

다윗이 드디어 왕이 되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4) 다윗은 이미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새의 집에서 사적으로 받은 것입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왕이 되겠다는 각성이나 개인적 소명 정도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공식적으로 유다 지파에 의해서 왕으로 추대되었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 그 영광스러움을 찬양합니다. 물론 이스라엘 전체의 왕은 아닙니다. 나중에 다윗은 통일왕국을 이루고 온 이스라엘에 의해서 세번째 기름부음을 받습니다(삼하5:3). 어찌 되었든 이제는 도망자가 아니라 왕입니다.

다윗은 기회가 오자 재빨리 결단을 하였습니다.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은 무주공산입니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시글락에 머물고 있는데 이곳은 블레셋 영토입니다. 다윗은 헤브론으로 신속히 옮겨갔습니다.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구입했던 막벨라 굴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의 무덤이 있습니다. 헤브론은 유다의 중심 도시입니다. 이미 다윗은 이곳에 자신의 전리품을 나눔으로써 기반을 닦아 놓았습니다. 유다 지파를 기반으로 이곳에서 7년 6개월을 다스렸습니다.

다윗이 시글락을 떠나며 몰래 빠져나갔는지, 블레셋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떠났는지, 블레셋과 마찰을 빚으며 마치 출애굽하듯이 떠났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것은 과감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결단이 필요할 때는 단호하게 해야 합니다. 미적거리면 때를 놓칩니다. 물론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묻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1) 이미 다윗은 결심이 섰고 헤브론으로 갈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추인한 정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구체적이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생각을 주셨습니다. 무엇을 망설입니까? 지금은 계획이 아니라 결단이 필요할 때입니다.

다윗은 왕위에 올랐지만 전 이스라엘의 왕은 아니었습니다.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2년 정도의 짧은 기간 지속되었던 분열왕국 시기입니다.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3:1) 다윗은 떠오르는 태양이고 사울의 집안은 기울어져 가는 석양이었습니다.

다윗은 왕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친화책과 강공책을 병용하여 사용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4절에서 7절의 길르앗 야베스에 대한 정책입니다. 야베스 주민은 위험을 무릅쓰고 블레셋 진영의 벳산의 성벽에 달려 있던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을 탈취해서 정중하게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다윗은 야베스 주민들의 이 의리를 기억하고는 그들에게 자신 또한 은혜를 베풀 것을 약속합니다. 지금 길르앗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개의치 않고 이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에게 그 유례가 없는 장례 조사를 보냈던 다윗은 사울 끌어안기 정책을 지속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였으며 온 이스라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좋든 싫든 과거의 역사를 끌어안고 가는 것은 성공하는 지도자들이 가진 덕이고 지혜입니다.  

남북 분열 왕국

반면에 군사적 행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내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내전에서는 다윗이 주도적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장군 아브넬과 그 용사들, 다윗 편에서는 요압과 아사헬과 그 용사들입니다. 실제 전쟁이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마치 다윗 혼자 싸운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군사들이 실제적으로 전쟁을 수행합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주체들의 등장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광보다는 고단함과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로 구성된 한 민족이고 한 분 야훼를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이는 내전이고 형제들 간의 전쟁입니다. 그 비극은 아브넬과 요압의 싸움에서 잘 드러납니다. 전면전을 벌이기 전에 양측의 용사 12명씩 나와서 일대일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마치 연극 한 장면 같습니다. “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16) 헬갓하수림, 곧 ‘칼의 벌판’이라는 이름까지 붙었습니다. 열 둘은 곧 이스라엘 지파를 상징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는 ‘행위 예술’과 같다고 주석합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형제간 전쟁의 비극을 실제 죽음의 행위 예술로 보인 것입니다.

비극은 아브넬과 요압의 동생 아사헬 사이에도 벌어집니다. 아사헬은 ‘들노루 발’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빨랐습니다. 그러나 싸움에는 능숙치 못했습니다. 아브넬은 너를 죽일 수 있으니까 따르지 말라 하였지만 아사헬은 무리하게 추격하다 아브넬의 창에 찔려 죽습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이 요압의 동생임을 알고 있습니다. 잘 아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을 죽였고 이 때문에 요압은 아브넬에게 보복해야 하는 가족 간의 피의 복수가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요압은 나중에 사적인 감정으로 아브넬을 죽여 대사를 그릇칠 뻔하였습니다.

전쟁이 계속되자 휴전을 요구하며 아브넬이 이렇게 말합니다.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26) 여기 형제라고 합니다. 요압 또한 “그의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27)고 말합니다. 아무리 대의를 위한 전쟁일지라도 형제간에는 하지 못할 일입니다. 빨리 끝내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이민족을 대항한 전쟁은 허락하시지만 형제 간의 전쟁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역대기서에 보면 남북왕국이 막 갈라지려 할 때 남왕국 르호보암 왕이 군사를 이끌고 북왕국의 여로보암 세력을 치려고 합니다. 이때 선지자 스마야가 나타나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와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대하11:4) 여기 형제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르호보암 왕이 군사를 물립니다. 남북왕국 분열기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를 쳐서 포로 20만 명을 끌고갈 때 오뎃이라는 선지자가 나타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의 형제들 중에서 사로잡아 온 포로를 놓아 돌아가게 하라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박하였느니라”(대하28:11) 여기 또한 형제라 부릅니다. 이 말을 듣고는 북왕국 백성들이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합니다.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것 중에서 옷을 가져다가 벗은 자들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게 하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들은 모두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의 형제에게 돌려준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대하28:15) 우리 남한과 북한 간에도 전쟁하고 분열하고 미워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다윗

오늘 말씀에서는 정치가로서의 다윗의 면모가 매우 뚜렷합니다. 다윗은 여러 아내를 거느렸습니다. 3장 2절에서 5절까지 여섯 명의 아들이 거론되는데 이들은 여섯 여자들이 낳은 대표격에 해당합니다. 나중에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얻습니다. 다 정략적인 결혼입니다. 나중에 사울의 딸이었던 첫 부인 미갈을 다시 돌려받습니다. 이는 미갈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사울 가문과 결탁된 모습을 보여줘서 이스라엘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랑도, 일부일처라는 윤리도 없습니다. 자기 세력을 확대하고 기반을 다지기 위한 정치만 있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 아내 미갈을 빼앗기에 된 한 사람의 모습이 매우 슬프게 묘사됩니다. “그의 남편이 그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그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3:16) 이 남편의 울음은 정치가 가진 비정함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리더십이 실종되었습니다. 왕은 이스보셋인데 실권은 아브넬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아브넬이 사울의 첩 리스바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습니다. 이 또한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권력이 자신에게 넘어왔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행위입니다. 이를 이스보셋이 지적하자 아브넬은 자기가 왕으로 세운 은혜를 생각지 않는다며 심사가 뒤틀립니다. 이 때문에 나라를 다윗에게 넘기려 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3:9-10) 상한 감정과 분열 때문에 왕권을 다윗에게 넘기려 합니다. 다윗을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은 이처럼 적의 내분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브넬은 노골적으로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 나라를 다윗에게 넘기겠다고 합니다. 다윗을 찾아가서는 나라를 넘기기로 하고 약정을 맺었습니다. 다윗은 이를 기뻐하고 아브넬을 평안히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뒤틀은 것이 요압입니다. 요압은 동생을 죽인 아브넬을 다윗 몰래 암살합니다. 이로 인해 통일이 깨어질 위기에 처합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죽였다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아브넬를 위한 극진한 장례식과 애도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다윗은 장례식 정치를 잘합니다. 베옷을 입고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33) 하며 애곡합니다. 종일토록 금식하며 그 슬픔을 표현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36절입니다.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그 모든 책임은 요압이 뒤집어썼습니다. 요압이 사적인 감정으로 다윗 몰래 일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실상 다윗에게는 이로운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북왕국을 대표하는 장군입니다. 그는 경쟁자입니다. 그 경쟁자를 제거하는 악역을 요압이 하였습니다. 다윗은 손 안 대고 코푼 격입니다. 다윗은 책임을 철저히 요압에게 돌립니다.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39)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치세 동안 요압을 처리하지 않습니다. 요압은 나중에 솔로몬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매우 노회한 정치가의 모습을 다윗에게서 봅니다. 그렇다고 하여 다윗이 딱히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없습니다. 잘못이 조금 있더라고 항상 그렇듯 ‘백성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논리로 무마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과정에서 보아야 할 것은 이런 추한 내러티브 속에서도 하나님의 시계는 움직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윗을 통일왕국의 왕으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뜻은 더디지만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인간사에서 모든 것이 100% 깨끗하게 순수하게 진행되는 일은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실수가 엮이고, 이런 엉킨 실타래 속에서도 자기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약간 묻은 때로 인해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진흙탕 속에서도 진주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실현되어 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보면서 우리는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사무엘서강해 30. 예루살렘 시대의 개막(삼하4:1-5:25)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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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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