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 교회
  Home > 말씀이살아있고 > 설교동영상  

     
이종철 

[설교원고]

주일예배설교 2019.11.10.

사무엘서강해 28
사울과 요나단을 위한 조사


삼하1:1-27
1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2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3 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5 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6 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7 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8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9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10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11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12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13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5 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16 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 17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18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0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21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22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24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27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사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

사무엘하 1장입니다. 원래는 사무엘서는 한 권이었는데 중도에 사울의 죽음을 기점으로 사무엘서를 나눴습니다. 사무엘 상권은 사울과 다윗의 경쟁을 다루고 있고, 사무엘 하권은 다윗이 주인공이 되어 통일왕국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다윗의 새 시대를 여는 그 첫 사건으로 사울의 죽음과 그를 위한 장례사가 언급됩니다. 이를 통해 한 시대의 마감과 그 시대의 계승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아말렉 한 청년의 보고에 의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고의 내용이 좀 다릅니다. 31장에서 우리는 사울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포위망에 갇힌 사울이 시종에게 할례받은 자에게 죽을 수 없다며 자기를 죽이라고 하였지만 시종이 차마 그렇게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칼에 스스로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말렉 청년은 다른 식으로 보고합니다. 자기가 보니 사울이 죽어가고 있었고 고통스러워하며 자기를 죽여달라고 해서 자기가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사울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 왔다고 하였습니다. 청년의 보고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윗의 정적이 사울이었음을 알고 다윗에게 자기 공을 내세우기 위해 자기가 죽였다고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이에 대해서 명확히 거짓말이라고 부연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미 사무엘상 31장에서 언급했기에 더 이상 필요가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실제 그랬을 가능성을 열어둔 것일까요? 사실 이런 일은 우리 인생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죽음은 그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기대나 의도에 따라 한 사람의 죽음은 왜곡되기도 하고, 진실이 덮어지거나 아니면 드라마틱하게 미화되기도 합니다. 특히 위대한 사람의 죽음에서 그런 경우는 많습니다. 죽음은 한 존재의 사라짐이기에 명예스런 방향으로 기억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가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죽음의 한 순간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그의 인생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간에 다윗에게는 이 청년의 말이 유일한 진실입니다. 처음 듣는 소리이고 유일하게 다윗에게 들어온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정적인 사울을 죽인 청년을 칭찬할까요? 오랜 적이 사라진 것에 매우 기뻐할까요? 다윗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크게 슬퍼하였고 이러한 악을 행한 청년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은 무엇보다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했습니다. 자기 정적의 죽음이 아니라 이보다 더 큰, 이스라엘을 지키던 왕의 죽음입니다. 다윗의 조가는 이스라엘을 지키던 용사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였습니다. 이것이 대인배와 소인배의 차이입니다. 자기 눈앞에 있는 이익만 추구하는 자와 나라와 대의라는 더 큰 것을 보는 자의 차이입니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뜻과 선택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 가운데 세운 왕입니다. 인간이 이를 저지할 수 없습니다. 사울을 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여러 번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을 자기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존중하니 하나님이 다윗을 높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우습게 여긴 아말렉 청년에게는 죽음이 주어졌습니다.

끝으로는 정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사랑했기 때문이며, 사울은 미워하면서 정이 들었습니다. 고운 정도 정이고 미운 정도 정입니다. 한 인생과 엮였고 자기를 지탱해오던 한 축이 무너졌습니다. 다윗은 조가로 그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에게 한이 남지 않습니다.

사울을 위한 조사

17절 이하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의 조사입니다. ‘활의 노래’ 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조사의 내용은 전적으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입니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19)는 탄식이 25절과 27절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울의 단점이나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두 용사의 죽음을 적들이 알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 죽음을 기뻐할까 보아서입니다. 두 용사가 피를 흘렸던 길보아 산은 그 대가로 더 이상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고 밭에 소출이 없도록 저주합니다. 이것은 슬픔의 표현이지만 실제 이런 일이 벌어져 전설처럼 내려오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위대한 한 인물의 죽음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영향을 미칩니다.

사울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애도가 슬픔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이나 베냐민 지파의 아픔을 달래고 있습니다. 이 조사는 통합된 이스라엘을 만드는 결정적 정서, 곧 파토스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당신의 죽음을 나는 매우 슬퍼한다.’ 이런 파토스가 이스라엘을, 한 가족을, 한 공동체를 하나로 만듭니다.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갈릴 때 다윗의 유다 족속과 함께 했던 지파는 베냐민 지파입니다. 원수 관계였는데 장례식을 잘 치르니 하나가 되었고 영원한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이런 조문 정치를 통한 파토스 형성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은 위원장이 죽었을 때 우리 쪽에서 애도를 표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불온시하며 반공의식이 더 고조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당국자들이 남쪽이나 북쪽을 방문했을 때 상대방 위령탑에 조문하는 일이 정치적 논란거리가 됩니다. 남북한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선이고 악인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며 갈등을 지속해 왔습니다. 죽은 자를 애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며 이제 갈등을 끝내고 통합하자는 의미입니다. 조문이 이러한 강력한 파토스를 만들어냅니다. 비단 남북문제만이 아니라 이승만 전대통령이나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조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계열에서는 이분들의 장례식을 아름답게 기억하지 않으려 합니다. 독재라는 부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나라를 세우고 근대화를 이룬 공도 이분들에게는 있습니다. 또 현실적으로 이 분들을 추앙하는 세력도 존재합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지도자들로 받아들이고 애도했으면 합니다. 대통령도 진보 인사도 이분들의 장례식 날에 함께 참여하여 애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근대화기의 대통령들이 한쪽 편의 지주로만 전락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유산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조문은 좋은 계기입니다. 다윗은 그 기회를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단점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웠다고 찬양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23) 이 두 사람의 용맹함을 찬양합니다.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22) 그들은 용장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용맹함을 찬양하지만 오히려 성서는 더 집요하게 사울의 실패를 지적하였습니다. 사울 또한 40년이라는 오랜 세월 왕좌의 자리에 있으며 이스라엘을 지켰는데 사울에 대한 평가는 너무 일방적이지 않은가요?

사울의 실패로 인식되는 대표적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상 13장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블레셋과 싸울 때 사무엘이 제때 오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사울이 제사장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 때문에 사울은 사무엘에게 심한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보면 다윗 또한 그러지 않았습니까? 사무엘상 30장에서 아말렉과 싸우러 갈 때 다윗은 자신이 제사장인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삼상30:7-8) 다윗은 제사장이 아님에도 제사장의 옷인 에봇을 입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동일한 듯 보이는 행위가 사울에게는 중죄가 되었고 다윗에게는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검찰처럼 기소권을 남용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중죄로 지적된 것은 아말렉과 그 소유물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귀중한 일부 소유물들을 빼돌렸다는 죄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30장에서 아말렉을 치면서 그들의 소유를 진멸하지 않고 전리품으로 다 소유하였습니다. 그것을 유다 지파와 나누기까지 하였습니다. 아말렉에게 행한 동일한 행동에 대해서 하나는 죄가 되고 하나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습니까?

물론 성서가 죄라고 하면 죄이겠지요. 문제는 하나 하나의 죄가 아니고 사울 인생의 전반적 태도입니다. 핵심은 사울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고 그때그때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이해나 생각에 빨랐고 이것이 사울을 실패로 이끌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울 인생의 일면일 뿐입니다. 그는 용사로서 용맹을 떨쳤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먹이고 지켰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에 대해서 이스라엘 딸들에게 슬퍼하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24) 이스라엘의 부와 안정은 다름 아닌 사울로부터 왔고 사울은 그런 면에서는 하나님의 충실한 도구요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단점은 감추고 그의 장점은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조사입니다. 슬픔을 나누는 방식입니다. 한 인생의 일생은 그 자체로 위대합니다. 그 마지막에 아름다운 찬가를 들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활의 노래

다윗의 조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의 참된 벗 요나단의 죽음입니다. 다윗은 이에 대해서 매우 슬퍼하고 있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26) 이는 동성애에 대한 찬양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성서에서는 동성애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남자와 남자 사이의 극진한 우정입니다. 요나단의 죽음을 다윗은 매우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정과 사랑과 신뢰를 표할 수 있는 친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요나단의 복입니다.

우리의 장례식은 어떠할 것 같습니까? 나를 위하여 울어 줄 친구가 있습니까? 조사를 남길 만큼 업적이 있습니까? 유대 탈무드에 나온 한 교훈입니다. 어떤 사람이 왕으로부터 호출을 받았습니다. 왜 호출했는지 모르는 이 사람은 마음이 불안해서 세 명의 친구들에게 함께 동행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그동안 가장 소중히 생각해왔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같이 가자고 하니까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사랑은 하고 있었지만 첫 번째 친구만큼 소중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두 번째 친구는 궁궐 앞까지만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친구는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친구는 요청을 받자 왕의 앞까지라도 같이 가서 자기가 변호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탈무드에서는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이고, 두 번째 친구는 친지이고, 세 번째 친구는 선행이라고 결론을 짓습니다. 왕의 호출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소식을 듣자 재산은 즉시 떠납니다. 가족은 장례식까지만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까지 영원히 남는 것은 선행뿐입니다.

사랑은 선행입니다. 한 사람의 벗이 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선행입니다. 재물이나 일로 이웃을 돕는 선행은 말 그대로 선행입니다. 선행을 많이 행한 자의 장례식에는 울어 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를 향한 조사도 풍성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조사의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활을 주셨습니다. 이 활이 꺾이지 않고 이 활로 멀리 정확히 쏘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칭송받는 영원한 용사의 활로 남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서강해 29. 헤브론에서 다윗이 왕이 되다(삼하2:1-3:39)

이종철

   사무엘서강해 27. 다윗의 승리와 사울의 최후(삼상30:1-31:13)

이종철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Puresunn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