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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구원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 acduk 님의 책임적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곧 구원이며,
사회적 불의에 항거하는 과정이 곧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주장에 대해 >>

구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인간을 생물적 존재, 사회적 존재, 영적 존재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생물적 존재의 목적은 자기 생명의 보존과 충만입니다.
그러므로 생물적 존재에게 있어서 구원은 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요소,
곧, 목마름, 굶주림, 병듦, 육체적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존재의 목적은 사랑입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만납니다.
이 사랑이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존재에게 있어서 구원은 이 사랑의 관계를 위협하는 모든 불평등과 불의, 미움과 갈등으로부터 벗어나서 사랑의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의 목적은 신과의 합일입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의미를 찾아 부지런히 방황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연어가 자기가 태어났던 곳을 향하여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듯 인간은 신과의 합일을 향하여 필사적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존재에게 있어서 구원은 신과의 합일을 막는 방해물들을 제거하고 신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 성서나 공관 복음서에서는 이런 세 가지 차원에 대하여 모두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병자가 낫는 것도 구원이요,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킨 것도 구원이요,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는 것도 구원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나 바울 서신서 등에서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구원 의미가 보다 중요하게 강조됩니다.
종교개혁을 비롯한 기독교 전통도 역시 이 세 번째 차원을 보다 중요시했습니다.
이 세 번째 차원에 근거한 구원이해는 이제 정통 기독교의 구원관이 되었습니다.

민중신학은 이에 반기를 들고 구원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하였습니다.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며,
자기 중심성에 사로 잡혀 있는 즉자적 민중이 이웃과 사회를 위해 투쟁하는 대자적 민중으로 거듭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 동안 실종되었던 이스라엘의 해방 전통의 회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지나치게 사회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영적 측면을 간과하는 또 하나의 극단의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구원 이해에 있어서 이 세 가지 측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전인적인 면이 모두 포괄될 때만이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측면은 어쩔 때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을 수도 있고, 역사적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은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등식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의 대상이 인간이라면, 하나님 사랑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기적이나 신비스런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각 체험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는 소중한 하나님 체험들입니다.
이 체험들은 관념적이다 추상적이다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에 그 체험을 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적인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은 단지 이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만 축소시킬 수 없는,
더 넓고도 깊은 차원을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건 신약 시대건 기독교는 지금까지 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제일의 목표로 하여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여기에는 분명 정의와 풍요라는 것들이 문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입니다.
성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의 어그러짐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씀하며, 이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때 나머지 문제들도 해결된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정의가 이루어지는 곳 못지 않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는 인격의 은밀한 그 곳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이라는 사건을 관념적이며, 초월적인 것이 아닌 어떻게든 삶의 구체적인 이야기로 전환시켜보려는 acduk 님의 주장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만 사용하지,
그것을 확대 해석하여 구원의 정의마저도 재정의 하려는 오류를 범하진 말았으면 합니다.

새벽에 깨어 기도하고 있는 어떤 할머니가 있다고 합시다.
acduk 님은 이 할머니에게 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 분의 하나님 체험은 관념적이 아닙니다.
생생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acduk 님이 말하듯이 책임적인 존재니, 사회적 정의니 하는 것은 이 할머니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구원 개념을 이상에서 말한 세 가지 측면에 적용하고 싶고,
기독교는 이 중 특히 세 번째 영적 존재로서의 측면에 보다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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